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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 상실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草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 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황지우 시인 / 설경(雪景)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부린다.
황지우 시인 / 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황지우 시인 /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황지우 시인 / 손을 씻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義手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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