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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상 시인 / 옷장 속의 수국(水菊)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6.

이길상 시인 / 옷장 속의 수국(水菊)

 

 

  옷장 속에 수국이 핀다

  문을 닫으면 잎맥마다 어둠을 달덩어리처럼 키우는 수국

  주름은 낯설게 밝디밝은 것이었다

  마른 가슴 안으로 소리 없이 맺히고

  후두둑 떨어지는 금이 간 달

 

  견딜 만한 슬픔 속에서 다들 피곤해할 때

  절의 수국만이 수국답게 피어난다

  옷장 밖이 옷장 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옷장 문을 닫으면 수국이 핀다

  꽃이란 자신을 비워두고도

  멋쩍은 미소 짓는 것

 

  몸을 휘어감으며 다시 번지는 생의 濃淡

  그래, 옷장 속에 수국이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면 옷들만이 환한 얼굴을 보일 뿐

 

  공터, 버려진 옷장엔 벌레들이 소란스럽다

  이미 자신을 떠나온 지 오래인 수국

  벌레들은 이내 사라지리라

 

  저기 멀리 뻗어 있는 길 한 점

 

웹진 『시인광장』 2010년 9월호 발표

 

 


 

이길상 시인

1972년 전주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同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및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