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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바다와 시(詩)
난바다 칠흑의 수평선은 차라리 절벽이어서 바다는 대승(大乘)의 시를 읊는데 나는 소승(小乘)일 수밖에야 죽어 본 적 있느냐는 듯 바다는 눈물 없는 이 아름다우랴고 슬픔 없는 이 그리워지랴고 얼굴을 물거울에 비춰보라 하네.
제 가슴속 맺힌 한 모두어 품고 아무 일도 없는 양 말 없는 말 파도로 지껄일 때 탐방탐방 걸어나오는 수평선 밤새껏 물 위에 타던 집어등 하나 둘 해를 안고 오는 어선들 소외도 궁핍도 화엄으로 피우는 눈 없는 시를 안고 귀항하고 있네.
홍해리 시인 / 방짜징
죽도록 맞고 태어나 평생을 맞고 사는 삶이러니,
수천수만 번 두들겨 맞으면서 얼마나 많은 울음의 파문을 새기고 새겼던가 소리밥을 지어 파문에 담아 채로 사방에 날리면 천지가 깊고 은은한 소리를 품어 풀 나무 새 짐승들과 산과 들과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가슴속에 울음통을 만들지 않는가 바다도 바람도 수많은 파문으로 화답하지 않는가 나는 소리의 자궁 뜨거운 눈물로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한평생 떨며 떨며 소리로 가는 길마다 울고 싶어서 지잉 징 울음꽃 피우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죽은 목숨인 나를 맞아야 사는, 맞아야 서는 나를 때려 다오, 때려 다오, 방자야! 파르르 떠는 울림 있어 방짜인 나는 늘 채가 고파
너를 그리워하느니 네가 그리워 안달하느니!
- 시집『비밀』(2010)
홍해리 시인 / 백목련 날다
영혼이 맑으면 날 수 있다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린 소녀 땅 위에 사뿐 앉았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얼굴이 흰 소녀는 수많은 꽃등을 들고 여학교 화단가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목련나무는 서늘한 불길에 싸여 환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인 / 봄, 벼락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시집『봄, 벼락치다』(2006)
홍해리 시인 / 봄바람 속에
겨울바람 속에는 날카로운 솜방망이가 들어 있다 두억시니 어처구니 칼 찬 사내들 말발굽소리 대지를 가르지만 미나리꽝 얼음장 밑 푸른 미나리 살 오르는 소리 들어 보아라
봄바람 속에는 부드러운 칼이 들어 있으니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너 눈에 빠지며 엎어지며 불원천리 찾아왔다 기다린다는 것은 살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환장의 세월이었지
남은 겨울의 꼬리를 가차없이 잘라내려고 겨우내 부드럽게 칼을 갈았다 봄비는 조용히 울어 눈물로 겨울을 씻어내며 역습해 오는 꽃샘바람을 수비하기 위하여 비수를 가슴에 품는 것이니 봄바람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문자를 보라
봄이라고 바람 분다 봄바람 분다 봄바람 봄바람 바람이 분다.
홍해리 시인 /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 치매행(致梅行) 3집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詩답잖은 허섭스레기를 끼적거리느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아내는 홀로 매화의 길을 가고 있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2018년 가을에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 세란헌洗蘭軒에서,
홍해리 시인 / 부드러움을 위하여
물이랑 연애하고 싶다 물 가르는 칼이고 싶다
이슬아침 댓잎에 맺힌 적요로 빛나는 물이 스미듯이 자르는,
칼에 베어지기 전의 작은 떨림 그 푸른 쓸쓸함 한 입 베어 물고,
길 지우는 배경 물로 살아나듯 칼 지우는 투명한 물이고 싶다.
홍해리 시인 / 비 그친 오후 선연가(嬋娟歌)
집을 비운 사이 초록빛 탱글탱글 빛나던 청매실 절로 다 떨어지고 그 자리 매미가 오셨다, 떼로 몰려 오셨다
조용하던 매화나무 가도 가도 끝없는 한낮의 넘쳐나는 소리, 소낙비 소리로, 나무 아래 다물다물 쌓이고 있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한평생을 노래로 재고 있는 매미들, 단가로 다듬어 완창을 뽑아대는데, 그만, 투명한 손수건이 '하염없이 또 젖고 젖어,
세상 모르고 제 세월을 만난 듯 쨍쨍하게 풀고 우려내면서 매미도 한철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비 그친 오후 일제히 뽑아내는 한줄기 매미소리가 문득 매화나무를 떠 안고 가는 서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심봉사 눈 뜨는 소리로 연꽃이 열리고 있다 얼씨구! 잘한다! 그렇지! 추임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홍해리 시인 / 빈들
가을걷이 끝나고 눈 시린 하늘 아래 빈들에 서면, 빈들 빈들, 놀던 일 부끄러워라 빈들만큼, 빈들만큼 부끄러워라 이삭이나 주우러 나갈까 하는 마음 한켠으로 떼지어 내려앉는 철새 떼 조물조물 주물러 놓은 조물주의 수작들!
홍해리 시인 / 산책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시집『독종』(2012,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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