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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꽃이 피기도 전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6.

홍수희 시인 / 꽃이 피기도 전에

 

 

당신이 내 안에서 피고지기를

벌써 몇 번인지 몇만 번인지

 

나의 첫사랑,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을 위해

봄이 오기도 전에 꽃씨를 심고

꽃이 피기도 전에

그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내게 죽음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생명이란 걸

당신이 내게 아픔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기쁨이란 걸

당신이 내게 끝없는 미로迷路라면

또한 당신은 반듯한 목적지란 걸

 

이제 나는 알듯도 해요

 

당신이 내 안에 피고지기를

이후로도 거듭 반복되겠지만

이제 그것으로 당황하지 않아요

 

꽃이 피기도 전에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홍수희 시인 / 낙엽 한 잎

 

 

나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낙엽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여윈 가지 부르르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무수한 것들

비단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아직 내 안에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마음가지 끝 빛 바랜 잎새들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집착과 애증과 연민을 두고

이제는 안녕, 이라고 말해볼까요

물론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홍수희 시인 / 낙엽이 나에게 건네 준 말

 

 

어느 날

차창에 낙엽 한 잎

노란 몸짓으로 날아오더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건네주는 말

생각해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뭐겠니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네

어느 익숙한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니면……

머뭇거리는 나에게

낙엽이 가만히 속삭이는 말

생각해봐,

내가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받아 줄 사람이 거기 없을 때

가슴 저미는 일이야

두 손에 가득 선물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 일인 거야

바람만 불어왔다 불어가 버리는

혼자 남은 괴로움이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렴

 

 


 

 

홍수희 시인 / 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릴 때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립니다

 

눈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등을 대고 서로의 가슴을 읽다

입술을 앙다물고 돌아서는 쓸쓸한 저녁

흰 눈이 내립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어찌 늘 기쁨은 아닌 줄은 알면서도

보란 듯이

또 보란 듯이 흰 눈만

서늘한 내 가슴에 하득하득 흩어지며 내립니다

 

 


 

 

홍수희 시인 / 내 마음을 주고싶은 사람

 

 

부드러운 음성을 가진

당신에게는

애정 가득 담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여유로움 간직한

당신에게는

포근함 가득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는

끝이라도 아깝지 않을

내 모든 것 다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당신에게만

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