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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11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5.

황인숙 시인 / 11월

 

 

납물처럼 떨어지는 빗줄기 속.

온종일 슈퍼마켓 처마 밑에서

발이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코를 바라보던

거지 아이의 마음을, 은전 한 닢,

햇빛으로 주조한 것인 양

따스하게 하네.

 

 


 

 

황인숙 시인 / 11월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

 

 


 

 

황인숙 시인 / 가을날 새벽

 

 

가을날 새벽

말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

쭉 훑어낸

손가락 시리다

 

가을날 새벽

서른댓 개의 증증계

뚜벅뚜벅 짚어

깡총깡총 뛰어

내 몸 속에

층층계

발끝 시리다

 

참은 숨 물밀리듯

얼굴 시리다

가을날 새벽

 

흠뻑 울음 운

젖은 눈들의 숲

새들이 길을 흔든다.

 

 


 

 

황인숙 시인 / 가을밤 1

 

 

습기를 전해 주던 바람이 습기를 거둬 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풍 드는 나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질 나뭇잎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늙어갈 친구들과 나

 

소슬바람에 가팔라진 가슴

베어 물 듯 귀뚜라미 울고

홀로, 슬며시, 어둡게

온 생이 어질어질 기울어지는

벼랑 같은

밤.

 

 


 

 

황인숙 시인 /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황인숙 시인 / 거미의 밤

 

 

빨랫줄과 탁자 사이에

거미가 그물을 친다

나를 미끼 삼아

물 것들을 노리는 거다

거미는 흐린 공간을 지어놓고

그 테두리에 숨었다

블랙홀이며 암흑 주머니,

한 번도 북적인 적 없는

시간의 거미

 

나는 후욱 흐린 거울을 불어본다

흐린 거울 속의 흐린 나무들과

흐린 불빛이 흔들린다

(그런데 진짜

거미의 집은 어디일까?)

 

거미가 깊어간다

바람이 소슬, 거미줄을 흔든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소슬소슬!

거미줄을 흔든다

나는 문득 쇠약해진다

 

 


 

 

황인숙 시인 / 겨울밤

 

 

나는 네 방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로

네 방을 질척질척 얼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내가 춥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황폐함

피로,암울,막막,사납게

추위가 삶을 얼려 비트는 황폐함

그러면서도 질기게도

죽을 것 같지 않은 황폐함

 

모르는 별로 너 혼자

추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영혼을 뒤쫓는 것이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라면?

 

아,나는 네 영혼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포근한 바람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죽었는지 모른다.

 

 


 

 

황인숙 시인 / 겨울 햇살 아래서

-갑숙에게

 

 

철 모르고 핀 들풀꽃과

미처 겨울잠에 들지 못한 철없는 꿀벌이

겨울 햇살 아래서 만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우리한테 미래는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미래에 대해 곰곰

생각하는 얼굴일 것이다

겨울 햇살 아래서.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