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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악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5.

조정권 시인 / 악마

 

 

어쩌다 머리에

잎이 돋아났는지.

그날은 오후 좀 늦은 시간,

서류철을 들치는데 실이 풀어지듯

졸음이 왔다.

잠깐 잠든 그 사이에 누가

장난을 친 것이다.

나이 사십 된 이마를 뚫고

머리 위로 비죽 솟아 나온 잎사귀.

흉측한 검정 잎사귀.

그는 황급히 조퇴신청을 하고

직장을 빠져나왔다.

그날은 오후의 좀 늦은 시간

서류에는

그가 파우스트로 되어 있었고

메피스트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역할을 망설이다가

결재서류에 사인을 보류하고

잠시 먼 바다를 생각했었는데

흰 돛단배가 그의 머리를 싣고 간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자넨 왜 모자를 쓰고 근무하나.

그는 신성한 분위기에 방해를 주는 모자가 미안해

머리를 숙였다.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제사장(祭司長) 앞에 불려갔다.

꼭 그렇게 티를 내야 하는가.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시말서를 제출했다.

복무규정 몇조 주의 촉구.

하지만 그는 모자를 벗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감사관 앞으로 불려갔다.

자네 왜 그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가.

찍은 적이 없는데요.

그럼 이 도장은 누구의 것인가 설명해 보게.

그는 서류를 들여다본다.

내 도장이지만 나는 찍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가만히 문자 사이로 빠져나가는 흰 돛단배를 본다.

그는 그날 메피스트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사태는 꾸며져 있었는데,

조퇴를 해버린 사실이 기억났다.

그는 찍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왜 조퇴를 했지? 말할 수 없습니다.

감사관은 서랍을 열고 봉투를 내놓는다.

이건 자네 부하의 투서일세.

자네는 구내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늘

나가서 먹었고

머릿속으로는 늘 딴생각만 했어.

감독 소홀! 품위 유지 소홀!

동료들도 나가주었으면 하는 눈치더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메피스트의 지시를 받은 자들은 위에 있고

그는 그것을 단순히 수행하는 단순노예일 뿐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자를 벗어보게. 도대체 그 속에

무엇을 숨기고 다니나?

어서 모자를 벗어!

그는 벗지 않는다. 그는 벗지 않는다.

이건 명령이야. 어서 벗기란 말야!

의자가 나뒹굴어지고 그의 두 팔은

그의 두 다리는 묶여지고

그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린다.

모자는 벗겨진다.

빌라도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듯

감사관의 눈도 휘둥그래진다.

아무것도 없는 머리.

 

세상은 늙어가고

시계추는 매일 오가던 길을 되가고

그는 직장에 다시 구속되어

여느 때와 같이 서류뭉치를 들친다.

그는 관용(官用) 용지에 딱딱하게 타이프된 글자들을 한 자씩 해방한다.

그는 한 자씩 한 자씩 사인 속에 옭매인 몸의 밧줄을 끊어준다.

그리고는 그 빈자리에 시멘트를 붓는다.

그는 다시 빌라도에게 불려갔다.

 

신성한 숲, 문학과지성사, 1994

 

 


 

 

조정권 시인 / 어둠의 뿌리

 

 

열한 시 이후부터 밤은 마당에 혼자 남는다.

지샐 곳이 없는 나뭇잎들이 구석에 모여

구석에 깃든 어둠을 한층 더 짙게 한다.

이런 밤엔 누구와 자도 잠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돌멩이가 가득 찬 밤하늘이 내리누르는

납덩이 같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유난히도 마당 구석에 진하게 모여 있는 나뭇잎의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밤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 뿌리를 그리워한다.

기댈 곳이 없는 모든 것들이

차가운 흙 위에 등을 깔고 누워

흙속의 어느 따스한 품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열매

 

 

말을 배우지 않은

아가들은 아름답다

 

말을 배우지 않은

아가들은

푸른 감람나무 가지를

사나운 꿈으로 흔들고

푸른 잎사귀에 담겨

다시 잠든다.

 

감람나무 밑에

부드럽게 누운 그늘 때문에

 

말을 배우지 않고

죽어간 아가들은

더욱 아름답다

 

어머니는 슬픔이나 눈물방울의 언어로써

아가의 요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순결한 아침의 잠자리에서

잠깐 잠을 자고 간 아가들은 이튿날이면 더욱 아름답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오색(五色) 약수

 

 

한계령(寒溪嶺)에서 내설악(內雪岳)으로 들어가다 보았다.

잘살아 보자고 잘살아 보자고 노 저어 나가던 마음들도

웬만큼씩은 식고 웬만큼씩은 늙어

의(誼)좋게 바위터에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을.

한여름의 솜구름이 내려와 쉬는 오색(五色) 약수터에서 보았다.

포도나무 잎사귀에서 뽑아낸 포도나무 잎사귀 색깔로 그린

무신도(巫神圖) 한 장이 약수터에 곱게 모셔져 있는 것을.

구성지게 가락을 뽑는 40대(代) 여인 옆에서 장님 남편이

소주를 들며

의(誼)좋게 기대고 있는 것을.

 

허심송, 영언문화사, 1985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