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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편지
누구의 편지일까, 발신인(發信人) 없는 편지 한 통 비에 젖어 버려 있다. 찢어진 하늘에서 투서(投書)로 내리는 비. 언어(言語)는 축축이 젖어 있다. 비는 내려도 이 도시(都市)의 녹음은 씻겨만 가고 신뢰할 그 아무것도 벌써 내겐 없는데 대담하게 쓴 한 통의 편지, 혹은 밀고(密告), 혹은 진실(眞實). 그러나 염려치 마라 하나의 진실(眞實)이 비에 씻기고 하나의 아픔이 잠자더라도 빗장을 걸고, 전깃불을 끄는 일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 있으니까.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한 알의 밀알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석탄(石炭)이 될까, 석탄(石炭)은 겨울보다 더 깊은 망각(忘却) 속에서 병(病)을 앓는다. 겨울보다 더 춥게 가슴에 치미는 불,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이듬해, 라일락 뿌리가 되지 않거든 술이 되거라. 마른 나무에 뿌려지는 석유(石油)처럼 마른 가슴을 적시는 술, 한 개피 성냥 위에 붙는 불이 아니라 쥬라기 지층(地層)에서 타오르는 불.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한 줄의 시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 너를 버리는 배신(背信)의 아름다움,
인생(人生)이란 한 줄의 시(詩),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行間)을 건너 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황홀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 오고, 황홀은 후각을 통해서 온다. 봄에 뜻없이 황홀에 젖어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천자만홍(千紫萬紅)그의 찬란한 색깔보다 향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청순한 ─백합, 20대 소녀의 순결한 ─라일락, 30대 여인의 달콤한 ─아카시아, 40대 숙녀의 요염한 ─장미, 의 체취. 봄에 꽃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향기로 말을 쏟는다. 후각으로 오는 봄
오세영 시인 / 후회(後悔)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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