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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편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5.

오세영 시인 / 편지

 

 

누구의 편지일까,

발신인(發信人) 없는 편지 한 통

비에 젖어 버려 있다.

찢어진 하늘에서

투서(投書)로 내리는 비.

언어(言語)는 축축이 젖어 있다.

비는 내려도 이 도시(都市)의 녹음은 씻겨만 가고

신뢰할 그 아무것도

벌써 내겐 없는데

대담하게 쓴 한 통의 편지,

혹은 밀고(密告), 혹은 진실(眞實).

그러나 염려치 마라

하나의 진실(眞實)이 비에 씻기고

하나의 아픔이 잠자더라도

빗장을 걸고, 전깃불을 끄는 일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 있으니까.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한 알의 밀알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석탄(石炭)이 될까,

석탄(石炭)은

겨울보다 더 깊은 망각(忘却) 속에서

병(病)을 앓는다.

겨울보다 더 춥게

가슴에 치미는 불,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이듬해, 라일락 뿌리가 되지 않거든

술이 되거라.

마른 나무에 뿌려지는 석유(石油)처럼

마른 가슴을 적시는 술,

한 개피 성냥 위에 붙는 불이 아니라

쥬라기 지층(地層)에서 타오르는 불.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한 줄의 시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

너를 버리는

배신(背信)의 아름다움,

 

인생(人生)이란 한 줄의 시(詩),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行間)을 건너 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황홀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 오고,

황홀은

후각을 통해서 온다.

봄에

뜻없이 황홀에 젖어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천자만홍(千紫萬紅)그의 찬란한 색깔보다

향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청순한

─백합,

20대 소녀의 순결한

─라일락,

30대 여인의 달콤한

─아카시아,

40대 숙녀의 요염한

─장미,

체취.

봄에 꽃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향기로 말을 쏟는다.

후각으로 오는

 

 


 

 

오세영 시인 / 후회(後悔)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