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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시인 / 빈집
슬하(膝下)를 비운지 오래된 노인이 앙버티던 집마저 마침내 비었다. 잊을만하면 흐르던 개숫물과 빨랫줄에 휑하니 걸려있던 내의 몇 점이 존재증명의 전부이던 집. 집마저 마지막 무릎을 꺾으니, 영락없이 찢긴 거미줄 형세다.
처마 아래 연탄가스 냄새를 피우곤 하던 집. 누군가 지날 때 마다 비쩍 마른 슈나우저가 몇 번 본능처럼 짖다가 말던 집. 무슨 저항의 표시인 듯, 도라지꽃을 텃밭에 자욱이 피워 놓곤 하던 집.
마당에 솥 걸어 폐목을 때어 뭔가를 끓이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진땅에 누가 놓은 디딤돌을 간단히 치워버리곤 하던 영감님이 사라졌다. 희랍인 조르바처럼 키가 껑충하던 고집쟁이 영감님마저, 저 쓸쓸한 슬하(膝下)를 떠나버린 것.
말라붙은 고구마 줄기들, 따지 않은 채 메마른 고춧대며 옥수숫대들만 늦가을 비에 후줄근히 젖어가고 있었다. 지붕과 벽들이 천천히, 주저앉고 있었다. 제 아랫도리를 지우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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