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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육체로 작품 만들기
나는 밤에 켜 놓을 수 있는 발광(發光)예술을 하고 싶다. 떨어뜨리고, 튀기고, 흔들고, 뛰어 오르고, 살고 죽고 하는 따위의 예술을 하고 싶다 ―클라에즈 올덴버그
1968년 실종되었던 체코의 시인 조셉 호니는 무화과 새 잎을 눈썹에 붙이고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신작(新作)을 소개하겠다고 친구들을 초대해 놓고는 실제로 친구들 몰래 자살해버렸다.
일본의 가즈오 시라가는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도로에 흰 광목천을 깔아놓고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그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인체가 피걸레가 되어 찍힌 광목천이 신작(新作)으로 친구들 앞에 소개되었다.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일명(逸名)
바보 화백(畵伯) 우리 마을에 살았네 평생 동안 붓 한 자루 종이 꾸러미 지고 산 오르기를 낙으로 했네 구름 속에 떠오르는 운봉(雲峰) 다섯 개 붓끝으로 번쩍 떠오고 바윗골에 소나무 고절(孤節)의 가지 솔방울 몇 줌 화선지에 흩뿌리는 기막힌 솜씨 장안 떠들썩 소문이 나자 앉아서 오징어 축 넘기듯 그림을 팔았네 산(山) 한 채 샀네 바보 화백(畵伯) 우리 마을에 살았네 어느 날 갑자기 산 오르기를 그만두었다네 산에 가서 소나무만 보면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고 바위나 괴석(怪石)만 보면 괜히 죄송스런 생각이 들었다네 죽을 때 남긴 말이 명언이야 나는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지폐를 그려 온 것이라나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잠 오는 사탕
요즈음은 아침 점심 저녁을 잠으로 때우고, 시간(時間)을 복용(服用)하고. 시간호(時間號)를 탑니다. 멋진 카누를 느릿느릿 노 저으며. 시간(時間)의 여행 그 끝에 도달하는 하얀 설탕의 대륙. 하얀 설탕 속의 함몰을 즐깁니다. 요즘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잠으로 때웁니다. 잠은 익숙한 구원의 방식입니다. 요즈음 나의 전부입니다. 요즈음 나는 잠의 반대 쪽에서 떠오르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간혹 눈길을 보내고 시간호(時間號)를 몰고 갑니다. 나는 나 자신이 생시(生時)의 바다에 떨어져 익사하지 않으려고 잠속에다 나 자신을 철근으로 칭칭 동여매 놓고 삽니다. 요즘의 나는 잠 오는 사탕을 상복(常服)합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時間)이란 잠 오는 눈깔사탕에 지나지 않습니다. 좀더 오래오래 녹여 먹어야 하는.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축자지송(筑紫之松)*송(頌)
1
바람 속을 뚫고 온 화살이라도 한 개 가슴으로 막으렷다.
2
이태 전쯤 얻어다 기른 축자지송(筑紫之松) 두 뿌리. 올여름 염천지옥(炎天地獄) 속에서 놋날같이 쩟쩟한 줄기 뻗어 골짜기 숨은 산(山)빛 끌어 내리다.
3
노옹(老翁)*께서 전해주신 당시전서(唐詩全書)와 함께 서재 가까이 두고 보고 또 보느니
저녁나절 산(山)밑바람 서늘한 한 자락 이마에 대어본다.
4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치고 헤쳐 앉아보다.
아, 먼지들의 고요함. 누군가 먼저 서재에 살아서 먼지에 구멍을 뚫고 있었구나.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우박이라도 맞으면 머리통이 환해질텐데.
5
꿈 속에 옥류천(玉流泉)에 나앉아 선동(仙童)들의 맨발을 씻겨드리다.
쉬임 없이 맑은 구슬 항아리로 날아와서 백옥(白玉) 위에 부어 드리고 또 부어 드리다.
6
눈 그친 저녁 깨뜨린 옥향(玉香) 나날이 고요해. 살빛 푸르름에 젖어 얼다가 밤 깊으면 향기 더욱 고적해 오다.
7
누가 깨우려 들겠는가. 저 무심(無心).
차라리 먼 하늘에 긴 장대를 휘둘러 죽(竹)이라도 힘차게 그리렷다.
* 축자지송(筑紫之松): 비파 축 검붉을 자. 글자 뜻 그대로 넓고 짙푸른 녹색 줄기에 자색기가 뻗쳐 있는 흡사 소나무와도 같은 기골이 서린 동양란. ** 노옹(老翁): 김달진(金達鎭) 옹을 가리킴.
산정묘지, 민음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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