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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너무 많은 입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입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 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 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 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잎들이 너무 다르다
천양희 시인 / 너에게 부침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이 어제 같아 변한 게 없다 날씨는 흐리고 안개 속이다 독감을 앓고 나도 정신이 안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삶이 몸살 같다, 항상 내가 세상에게 앙탈을 해본다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말라고 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우린 서로 기를 쓰며 기막히게 살았다 벼랑 끝에 매달리기 하루 이틀 사흘 세상 헤엄치기 일년 이년 삼년
생각만으로도 점점 붉어지는 눈시울 저녁의 길은 제자리를 잃고 헤매네 무엇을 말이라 할 수 있으리 걸어가면 어디에 처음 같은 우리가 있을까 돌아가면서 나 묻고 있네 꿈도 짐도 내려놓고 하루는 텅텅 빈 채 일찍 저물어 상한 몸을 가두네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이 눈이 어두워졌다.
천양희 시인 /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천양희 시인 / 노을을 적다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천양희 시인 / 누가 말했을까요?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천양희 시인 / 눈
눈을 보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었네요. 눈물은 왜 눈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고이기만 할까요. 고여서 자꾸 넘치기만 할까요.
눈을 맞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덧 눈이 쌓여 눈길이 되었네요. 눈길은 왜 눈물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쌓이기만 할까요. 쌓여서 자꾸 높아지기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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