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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고아원
그들은 축축하고 추운 긴 복도다. 파리한 물고기 같은 달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한구석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묶여 있다. 발을 멈추고 쓰다듬자 요요처럼 내 손에 탁탁 붙는 새끼 고양이여. 그들은 멀거니 본다. 새끼 고양이 혹은 내 손길을. 항상 비껴선 복도여. 도무지 손길에 익숙지 못한 존재여. 아무 손길 닿지 않는 새끼 고양이들의 복도여.
황인숙 시인 / 골목길
울퉁불퉁 동네 집 사이로 난 좁은 계단길에 부러진 목발 기대앉아 있네요 외로운 얼굴로 기대앉아 있네요
작은 목발이에요 손잡이에 감긴 하얀 헝겊에 뽀얗게 손때가 묻어 있어요 참 작은 목발이에요 부러졌네요
지나가는 사람 드문 울퉁불퉁 좁은 계단길 햇빛 한 줌, 잡풀 한 줌 강아지 오줌 자국 한 줌.
황인숙 시인 / 공작소(工作所) 거리
비 멎은 오후 진흥 파이프 보일러, 동아 기계 제작소, 세일 철강 기계 상사, 자동차 시트 카바 전문점을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잠만 잘 분'을 찾는 전봇대와 가로등 제어 분전함을 지나 고시원을 지나 실비 식당을 지나 삼도 프레스를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황태자 CUSTOM TAILOR'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파르스름 물망초빛 와이셔츠, 벚꽃 분홍 남방셔츠 누가 저걸 사 입을까? 꼬깃꼬깃 접혔던 자국이 아직 선명한 막 봉오리에서 펼쳐진 꽃 같다!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진흥 파이프 보일러, 동아 기계 제작소, 세일 철강 기계 상사, 자동차 시트 카바 일꾼들이 사 입지
노란 도날드덕이 호스를 들고 춤을 추듯 차를 씻는 세차장을 지나 무지갯빛 기름이 뜬 웅덩이를 지나
꽃은 용접 불꽃, 소리는 드릴 소리, 냄새는 납땜 냄새.
황인숙 시인 / 공터
이런 공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폐업한 지 오래도록 간판도 내리지 않은 여인숙 먼지 낀 유리문 너머 퍼렁 옷과 빨강 옷이 쌓여 있던 유명 메이커 대(大)할인점 문밖으로 개숫물 졸졸 흘리던 떡볶이집 그리고 동사무소와 파출소 엉덩이 아래 이런 공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 자드락 맛을 물씬 풍기며
말짱 허문 집들 위로 공터가 불쑥 솟아났다 공터 한구석에 낡은 페인트처럼 껍질이 벗겨진 나무 한 그루가 어리둥절 솟아났다 나도 어리둥절, 얼마만인가, 이 공터
공터의 손을 가만히 잡으면 내 마음은 설렘으로 출렁인다 어린 시절의 공터들이 넘실넘실 돌아온다 그리웠던 공터 그리운 공터.
황인숙 시인 / 그녀는 걸었다
그녀는 걸었다, 긴 복도를 링거병을 끌고 졸음에 취한 나를 끌고 걸음, 걸음, 걸음, 문 닫힌 병동의 밤이 긴 복도 그녀는 쫓기듯 걸었다, 쫓기듯 아니, 그녀는 걸었다, 걸음, 걸음, 걸음, 자기의 걸음을 견디면서 자기의 걸음을 즐기면서 자기의 걸음을 확인하면서 걸음, 걸음, 걸음, 창백한 형광등 그녀의 걸음이 가득한 복도 그녀는 걸었다, 유령 같은 나를 끌고 걸음, 걸음, 걸음, 그녀는 걸었다 그녀는 걸었다.
황인숙 시인 / 그때는 설레었지오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어둠이 겹주름 속에 감추었다 꺼내고 감추었다 꺼냈지요, 만물을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리면 나는 삶을 파랗게 느낄 수 있었어요 움직였지요 빌딩도 가로수도 살금살금 움직였지요 적란운도 숲처럼 움직였지요
나는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보려고 가끔 발을 멈췄어요 그러면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어요 그들은 나보다 한 발 뒤에 움직였어요 달린다, 달린다, 움직인다, 움직인다, 우리는 움직임으로 껴안았지요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있을 수 없었어요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립니다 전신이 팔다리예요 바람이 자기의 달림을 내 몸이 느끼도록 어둠 속에 망토를 펄럭입니다 나는 집 안에서 귀기울여 듣습니다 바람은 달립니다 어둠의 겹주름 속을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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