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나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9.

황인숙 시인 / 나무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황인숙 시인 / 도시의 불빛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슬프든 노엽든 따뜻한 핏톨처럼

집집의 불빛들이

밤의 언덕, 골짜기에

고요히 웅얼거리며 맥박 친다.

 

 


 

 

황인숙 시인 /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 시인 / 삶은 감자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밤참이다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 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열대야처럼 푹푹

김 속에서 감자들

生을 수그리지 않는다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덥고 지루한 싸움이다

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겁다

이렇게까지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 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