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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나무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황인숙 시인 / 도시의 불빛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슬프든 노엽든 따뜻한 핏톨처럼 집집의 불빛들이 밤의 언덕, 골짜기에 고요히 웅얼거리며 맥박 친다.
황인숙 시인 /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 시인 / 삶은 감자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밤참이다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 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열대야처럼 푹푹 김 속에서 감자들 生을 수그리지 않는다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덥고 지루한 싸움이다 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겁다 이렇게까지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 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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