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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중복
한낮 들녘 파아란 하늘 미루나무 이파리 환상의 구름장을 몰아다 등줄기에 쏟는 소나기 쏴아하아, 매미 소리여.
홍해리 시인 / 지는 꽃에게 묻다
지는 게 아쉽다고 꽃대궁에 매달리지 마라 고개 뚝뚝 꺾어 그냥 떨어지는 꽃도 있잖니 지지 않는 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 과거로 가는 길 그리 가까웁게 끌고 가나니 너와의 거리가 멀어 더욱 잘 보이는 것이냐 먼 별빛도 짜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냐.
홍해리 시인 / 찔레꽃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 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홍해리 시인 / 찬란한 세상
소리는 귓속에 집을 짓지만 귓속에 들어가 보면 소리는 하나도 없다 사랑은 사람소리 떡에는 떡메소리 엿장수는 가윗소리 파도는 물소리를 소유하지만 모두 다 비웠을 때 비로소 소리의 집은 소리로 차서 소라껍데기 같은 이 귀가 빛난다 비어 있는 여자들의 소리는 귀에서 나와 이 세상을 찬란히 채운다.
홍해리 시인 /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홍해리 시인 / 첫눈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홍해리 시인 / 청명(淸明)
손가락만한 매화가지 뜰에 꽂은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니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발자국 떼지 못하고 청맹과니 멍하니 서 있는데 길을 밝히는 소리 천지가 환하네.
홍해리 시인 / 추상
할 일 다한 밤나무 꽃이삭 공중에서 교미를 마친 수벌처럼 숭얼숭얼 떨어져 땅에 누웠다 밤느정이 세상사 부질없다고 이별이야, 님과 나의 이별이야 이리저리 얽혀 응어리진 매듭 마지막 혼불로 풀고 있는 것인가 온몸이 꽃으로 무너져내린 사내 여장한 사내 푸른 치마 꺼꾸로 입고 그린 추상화 한 폭 밤늦게 홀로 돌아오는 길 대낮 같이 밝은 오월 보름날 느정느정 솔지 않은 희망이여 파란과 만장인 生의 만날이었던가 한 치 건너 두 치인 세상 달빛이 밤늦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 땅 위에 그린 밤늦의 추상화를.
홍해리 시인 / 춤
나비의 꿈을 엮다 나비가 되는 일 노래를 엮다 노래가 되고 학을 흉내내다 학이 되는 일
사위 속에 멈추고 정지 중에 이어지는 찰나와 영원 솟구치고 가라앉는 흐름과 멎음
물소리 그러하고 바람소리 그러하고 불길이 모여 빛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이 순간
영원을 타고 앉아 손끝에 피워 내는 꽃 한 송이 빙그르르 도는 우주.
홍해리 시인 / 층꽃풀탑
탑을 쌓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도 간절하면 몸이 흔들려 한 층 한 층 탑사塔寺를 짓는다. 층꽃나무를 보라, 온몸으로 꽃을 피워 올리는 저 눈물겨운 전신공양. 해마다 쌓고 또 허물면서 제자리에서 천년이 간다. 나비가 날아와 몸으로 한 층 쌓고 벌이 와서 또 한 층 얹는다.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달빛 선정(禪定)에 든 적멸의 탑, 말씀도 없고 문자도 없는 무자천서(無字天書) 경전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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