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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출가하는 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9.

황지우 시인 /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라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

 

 


 

 

황지우 시인 / 화광동진(和光同塵)

 

 

이태리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 하자!

눈알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悲劇詩人)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 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 /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