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연호 시인 / 백야
누구나 그렇듯이 더러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은 있다 하얗게 지새운다는 말뜻 그대로 창틀에 턱을 괸 채 골똘해지고 싶은 밤은 있다 멀리 나간 마음은 퉁퉁 불어터져 어둠 속에 익사하는데 우수수 별들은 쏟아져 손톱 밑에서 으깨지는데 미처 걷지 못한 밤빨래는 언제나 죽음처럼 펄럭이는데 진저리치는 전신주의 늑골마다 바람은 사무치게 훑어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잠꼬대를 또박또박 받아적고 싶은 밤은 있다 한번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는 그런 밤은 있다
강연호 시인 / 벌목
나무들 울면서 숲을 떠났다
둥지는 구겨지고 새들은 몸져누웠다 철거된 살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음산한 안개가 천천히 수의를 들고 다가왔다 즉음은 도처에서 도끼날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운 독재 그리운 페퍼포그 그리운 함성 오오 그리운 혁명 다 지난 뒤 나무들 울면서 돌아왔다 모두 빈손이었다
이제, 숲에는 벌목당한 청춘들이 너나할것없이 심심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을 뜯어먹으며 산다
강연호 시인 / 별
1
오늘 하늘에는 소금쟁이들 가득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불러 꼼지락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새워 걸어야 할 약속처럼 파문에서 파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소금쟁이들이 젖지 않듯 파문은 물에 젖지 않습니다 오늘 소금쟁이들 가득한 하늘은 고요했지만 그대는 텀벙텀벙 물에 젖어 내내 격렬했습니다
2
별들이 불러일으키는 고요와 격렬 속에서 그대는 잠들지 못합니다 고요는 하늘의 몫이고 격렬은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 아우성칠 때마다 별들은 자리 바꿔 앉으며 그대 어깨를 다독거려줍니다 그대가 파문이듯 하늘에도 파문은 일고 있지만 입술 깨물며 그대의 성화 견뎌내는 저 별들은 얼마나 완강한 고요입니까 젖지 않는 파문의 고요를 배우기까지 그대는 내내 젖어야 합니다
강연호 시인 / 봄 비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오래된 흑백 무성영화의 자막처럼 나른한 비가 내려 지난 겨울의 마른 버짐으로 남은 잔설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칡뿌리캐러 산을 오르는 아이들의 날궃이, 종이우산이 바람에 뒤집히면 거기 유년의 나도 섞여 있었다 미나리가 툭툭 살얼음 털고 일어서는 산비탈을 따라 높거나 낮은 봉분들의 생애가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게 역력했다 가는 비에 취한 아이들은 후미진 동굴도 그냥 지나쳐가고 가물가물 죽은 사람들이 한번더 죽는 봄비가 내려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강연호 시인 / 빈 가방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그는 무엇을 버렸을까 그가 버린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린 것이 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언제나 가득 차고 무거웠던 그의 가방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버린 것들 중에는 물론 그가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것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고 삶이란 또한 꼼꼼히 챙겨도 조금씩 새어나가게 마련이므로 불룩하던 그의 가방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그의 어깨는 웬일인지 자꾸 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더이상 버릴 것 없어 가방이 텅 비었을 때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 남은 것은 빈 가방이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빈 가방 대신 그 자신을 버린 것 같기도 하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공석진 시인 / 북소리 외 5편 (0) | 2020.06.25 |
|---|---|
| 하영순 시인 / 찔레꽃 향기에 쌓인 그리움 외 3편 (0) | 2020.06.25 |
| 홍수희 시인 / 장마 외 4편 (0) | 2020.06.25 |
| 이하석 시인 / 낙엽 편지 (0) | 2020.06.24 |
| 조정권 시인 / 노점상 (0) | 2020.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