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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선인장
선인장에 물을 주었다 일 주일에 한 번, 딱 한 숟가락씩만 주랬는데 어쩌나 보려고 흠뻑 주었다 녀석은 불타는 갈증의 혓바닥을 어떻게 식힐까 혹시 저렇게 가시로 내뱉는 건 아닐까 궁금증을 변명 삼았지만 가학에 재미를 붙이는 동물은 확실히 인간뿐이다 선인장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갔다 누렇게 담뱃진에 물든 내 손가락 같았다 선인장을 향한 이 맹목적인 증오는 물론 헛것이다. 내 속의 갈증 내 몸의 가시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강연호 시인 / 섬
한 사나흘만 묵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은 곤란해 아름다움이 외로움으로 바뀌기 전에 뭍으로 나가야 해 그런 굴딱지 달라붙은 다짐들은 먼저 바다로 띄어 보내며 까닭없이 아득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어느 이름 모를 몇 장의 바다를 걷어낸 뒤 또 다른 곳에서 한 사나흘 묵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안개에 곱게 머리 헹궈낸 바람결 따라 뿌우우 뱃고동 순한 물길 열어갈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떠돌수록 말없는 사내되어 제 그림자 스스로 밟을 무렵이면 애쓰지 않아도 잔잔하게 밀려 비로소뭍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연호 시인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제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강연호 시인 / 세월의 강물
내 지도 위의 눈물선을 따라 강은 흘렀네 푸른 실핏줄 촘촘하게 얽힌 저 강물 건너편엔 연좌하고 나를 불러 손짓하는 풀꽃들 죄다 아름답지만 저 강도 어제 건넌 그 강 같아서 산을 넘어뜨리는 힘으로 나 고개 떨구어야 했네 세상은 넓고 넓어서 내 부르는 노래는 메아리를 이루어 화답하지 못했네 지나간 달력에 또렷이 새긴 동그라미 두어 개는 무슨 날짜를 기억하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네 오 날짜의 파문 물결의 파문을 일으키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서 세월은 가나 세월은 가도 세월은 가지만 때로 삶은 시시했고 그래서 나는 시를 썼고 때로 시도 시시했지만 시시한 시를 쓰다가 밤을 새운 새벽이면 아무에게나 전화하고 싶었고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네 전화번호부책만큼 두꺼운 추억은 그 새벽 어디에도 깨어 있지 않았네 추억은 말하자면 무수히 몸에 달라붙은 도깨비풀 같은 것이었는데 추억은 말하자면 은행에서 잠자는 몇백 원쯤 남은 휴면계좌 같은 것이었는데 밤 기차가 천천히 기적을 끌고 가서 떼어내고 떼어내도 남는 이명처럼 나 너덜거렸네 오오 이 악물어 견디면 실핏줄 촘촘한 저 강물 죄다 터져 넘치겠네 내 지도 위를 범람하겠네
강연호 시인 / 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 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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