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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해철 시인 / 동해일기·3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7.

나해철 시인 / 동해일기·3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나해철 시인 / 두엄자리

 

 

두엄은 썩어서 금비가 되는데

지푸라기, 돼지똥, 닭똥 그리고 오줌이

섞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료가 되는데

벼가 먹고 보리가 마셔서

살이 통통 오르는 영양식이 되는데

헛헛한 내 가슴은

썩어도 어디 붙일 데 없다

가슴을 두엄자리에 내려

독새풀, 엉겅퀴, 억새, 물풀들과 포개져서

다 탄 재와 똥오줌에 달구어져

질 좋은 퇴비가 되면 좋겠는데

땅 위에 떠서 흔들리는 저 가벼운

내 가슴

누구를 만나 껴안아도

안기는 건 저같이 무게도 없는

빈 뼈의 집

 

 


 

 

나해철 시인 / 별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 끝에도

주먹만큼 별들은 매달려

외로워

외로워 말라고

파랗게 빛나는데

아직은 심장에 따뜻한 피 흐르는

내 가슴과 어깨 위에

어찌 별들이 맺혀 빛나지 않겠는가

사람들아 나를 볼 때도

겨울 나무를 만날 때도

큰 눈에 어린 눈물보다 더 큰

별이 거기 먼저 글썽이고 있음을 보라

 

 


 

 

나해철 시인 / 봄날과 시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나해철 시인 / 불

 

 

불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따스하게 찬 것들을 덥히고

온전히 재가 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꽃밭마다 몸을 던져

죽어서도 온기로 남아 있는 그대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불 주위의 새벽에

침묵으로 앉았다. 우리는 덥혀졌으며

추운 거리와,

거리의 방패, 구둣발을 잊었다.

가장자리와 가운데 어디서나 불은 타오르고

하늘의 흐린 별까지 닿아 올랐다.

눈시울에 몇 장의 낙엽처럼 떠오르는

지난 새벽과 정오, 황혼의

이 땅, 절망과 증오, 답답함과 비애에 대해서

오래 말들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불과

불의 순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은 귀하고

이 흙 위의 우리들 삶에

눈물겨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았다.

불 속에 한줌의 슬픔을,

누구는 한움큼 마른 뼈를 넣고 또 던지며

우리는 기다렸다.

새벽 불의 완성을,

우리들 기도의 간절한 끝을.

 

 


 

나해철 시인

1956년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전남대 의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 의학박사.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산포」가 당선되어 등단. 1984년 첫시집 『무등에 올라』 간행 이후, 『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만 꽃이 되는』 『아름다운 손』 『긴 사랑』 등이 있음. 현재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중. 현재 나해철성형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