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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7.

김지향 시인 /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강물이 눈썹까지 차오른

몸의 창문이 사방으로 밀리며

한 잎 한 잎 열렸다

물에 잠긴 몸의 부속품들이

송어새끼 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풀나풀 기어나온다

엊그제 잠입한 매연 찌꺼기도

살살 녹아 나온다

마구잡이로 먹어치운 공해물질이

소화도 안된 채 밀려나와 풀썩풀썩

강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사람의 눈이 해독할 거리쯤에선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물거품

눈썹까지 차오른 욕망을 말끔히 씻어내면

하얗게 피어서 떠오르는 빈 몸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꽃잎이다

나는.

 

 


 

 

김지향 시인 / 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공터 옆구리 어린이 놀이터 옆구리

익은 땡감들이 수은등처럼 켜져 있다

가을 내 초록 잎 지는 소리 아래로

고개 내민 말라깽이 단풍나무가

그림엽서를 만들고 있다

 

모두 떠난 언덕 밑 경사로에는

줄지어 미끄러지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멈춘

커브길이 까뭇까뭇 딱지를 덮고 누워있다

추적추적 짚신소리 끌고 따라오던 장맛비도

멈추어 섰다

물 젖은 바람이 볼가 낸 언덕 너머 서쪽 하늘이

무거운 낮잠을 벗는다

 

널따란 발코니 창가에서 나는 서쪽 하늘에

펼쳐지는 우주의 단막극을 구경한다

우주에서 풀잎이 한 켤레씩 톡. 톡. 떨어질 때마다

내 머리엔 한 땀씩 은빛 잎이 심어진다

은빛 잎은 머리에서 초롱꽃이 되어

앉았다 누웠다 깊은 머리 속

호수로 내려간다

 

내가 타고 갈 은빛의 우주선 한 채

아직 마감공사 덜된 채

깊은 호수 버티칼을 열고 내다본다.

 

 


 

 

김지향 시인 / 가을 눈물에 젖는

 

 

튕겨나간 하늘이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파삭한 가을 얼굴이

골목골목 포개 앉아 있다

나뭇잎이 떨어뜨린 눈물에

가을이 젖는다

 

하늘에 잎을 달아주며

하늘과 도킹하던 나무들

이젠 드러낸 알몸이 부끄러운지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 살이 덜 찬 열매를 따서

길가 좌판 위에 널어놓고 있다

짐수레마다 얼굴 붉히고 있는 열매들이

빤질빤질 눈물에 씻긴다

다 내어주고 몸 비운 가을이

뜨거웠던 시간들을 접어놓으며

영혼의 집으로 떠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중이다

 

나뭇잎을 신고 떠난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에 씻겨 살아난 가을은

내일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김지향 시인 / 가을 잎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의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김지향 시인 / 가을 화약 냄새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 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김지향 시인 / 가을바람.2

 

 

바람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건너간다

풍선은 달의 품에 안겨 느긋하게 날아간다

풍선이 달의 닮은꼴이냐고 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때 달은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바람이 풍선을 놓친 줄 모르고

달을 끌고 까불까불 산을 넘어간다

이윽고 달이 산 속에 몸을 숨기며 바람을 내버린다

하늘에서 쫓겨난 바람이 사과송이를 풍선인줄 알고

사과의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논다

사과송이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다

 

가을바람은 눈이 멀어 분별력이 없다

자꾸자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뿐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