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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슬픈 일만 나에게
사랑은 언제나 조금씩 늦게 온다 박정만 시인이 간 뒤 나는 종로서적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집을 만났다 그 는 우주로 떠났다는데 그의 시집은 이제야 내 책꽂이에 꽂히고, 안타까웠지만 언제나 사랑은 조금씩 늦게 온다 생전에 슬픈 일만 있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는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정작 슬프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슬퍼 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든지 더 이상 우주가 어둡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그가 그토록 아껴 닦았다는 램프를 켜 들고 저기 우주의 한가운데 길 밝 혀 서 있을 것이므로
강연호 시인 / 식당에서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고 신문을 펼치는데 탁자 위 누군가 떨구어놓은 김치 국물 한 방울이 그리고 거기 머뭇머뭇 다가서는 파리 한 마리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죽이는 내 시선을 자극한다 문득 인간의 생애란 게 삼류 멜로물이거나 위대한 서사거나 미처 닦아내지 못한 저 김치 국물 한 방울처럼 치민다 또는 그걸 먹어보겠다고 내 눈치를 살피는 파리 같기도 하다 나는 펼쳐든 신문으로 김치 국물을 닦아낼 수도 있고 척척 접어 파리를 때려눕힐 수도 있지만 홀연 허기마저 잊고 녀석과의 눈싸움에 몰입해보기로 한다 그 긴장의 거리가 나를 현현시킨다
강연호 시인 / 신발의 꿈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 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헤어져 저렇게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강연호 시인 / 언어의 꿈은 바깥에 있다
혀끝에 머물던 격렬함이 사라지자 그는 무덤처럼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가 겨누었던 대상을 향해 파르르 떨며 날아간 그러나 결코 적중하지 못한 흔적이 우울한 갈증에 섞이고 있다
그의 꿈은 바깥을 향하지만 한때 그를 긴장시켰던 오금 저리고 팔뚝마다 소름 돋았던 몸밖의 세상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축축한 사유의 달팽이처럼 제 몸이 바로 존재의 짐이라는 것
모든 언어에는 제 몸을 쥐어뜯은 상처가 있다
강연호 시인 / 여름 방학
내 텅 빈 숙제장 속에서 풀풀 삐져 나온 졸음이 자꾸 연필심만 부러뜨리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란 토란잎 그늘 속에 고스란히 오후를 숨겨 두었지만 비가 오려나 오랜 신경통을 콜록이시던 할아버지 아귀힘 잃은 손바닥만큼은 적막하지 못했다
가령 뜨물 같은 낮잠이 나를 데불고 개울 쪽으로 뜀박질해 간다 해도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물음표를 찍으며 숨죽이고 두리번거리는 송사리떼 아득할 뿐 물자멱도 혼자서는 쉽게 지치기 마련이었다
마루 밑 습한 곰팡내처럼 먹장구름 밀려오면 씨앗이란 씨앗 죄다 쏟아버릴 것만 같은 해바라기 받침대 하나 세워주지 못한 허리춤이 궁금했다
내 또한 그렇게 기댈 곳 없어도 스스로 중심 잡고 일어서는 법을 배워가는 동안 할아버지 그예 선산으로 떠나시고 잔기침에도 자주 걸려 넘어져 울던 누이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었다
허나 숙제장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내 열 손가락의 산수셈보다 적게 개학날 다가왔을 때 담장 밑에서 몰래 기웃거리던 코스모스가 먼저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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