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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 시인 / 스포일러
밤은 22개의 텍스트. 죽은 것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우울을 표절하는 시간. 초대합니다. 금요일 밤 11시, 안방극장의 영원한 비밀이 풀립니다.
달은 천 개의 비디오. 화려한 눈속임. 하루가 지친 날엔 빨리 감을 수도, 무음을 늘어뜨릴 수도, 공통적으로 우리는 스트리밍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던 70년대는
아기를 빼앗아 우물에 던지는 장면 같은 것. 이번에는 CG를 입혔어요. 육신이 거추장스러워 메모리에 모션만 남겼어요. 마루치와 아라치는 은퇴해 왕십리에서 태권도장을 한다니까요.
나이 사십에 노땅 취급이라뇨. 파란 해골 13호가 다시 돌아왔어요. 덩치는 커다랗지만 겨루다 보면 공통적으로 불쌍한 캐릭터. 손바닥에 올려놓은 프링글스처럼 우린 짭조름한 스토리를 좋아하잖아요. 약정 기간 없이 내내 이런 기분, 함께 채널 고정할까요?
뻑뻑한 눈가에서 젖은 모래가 흘러내립니다. 우기인가 봐요. 아스팔트에 녹은 무지개처럼 우리의 드라마는 어제를 품은 시리즈일 뿐, 따라잡을 수 없는 전편은 한밤의 맨홀로 빠져들고
우리는 몇 개의 역을 지나 강을 따라 먼 바다에 엔딩 크레딧 하게 될까요? 내일을 환승하는 침대가 삐그덕댑니다. 소음과 진동이 꺼지고 광고도 없는 꿈을, 미리 보고 있습니다.
월간 『문학사상』 2019년 12월호 발표
이필 시인 / 페르소나
내 나이 열여덟 살 때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죽기를 소원하는 한 늙은 여자가 내 안에 홀연히 들어와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밤이 오면 나직한 기침이 늙은 여자의 심기를 살피며 가만가만 책장을 되작이곤 했습니다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지 물어볼 수도 쫓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몇 해를 앓다가 나는 점쟁이를 다시 찾아가 그녀를 내보낼 비방을 얻어 왔습니다 느릅나무 껍질을 욕조에 띄우고 혈로 얼룩진 속옷가지 셋을 태우고 마당 안쪽 동백나무 밑에 열쇠를 묻었습니다 이듬해 붉은 꽃들이 가지에 들어섰습니다 햇살이 밀고 들어온 봉오리마다 수많은 다른 시간대의 방이 열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 나무 아래를 한참 머물다가 바닥이 파헤쳐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열쇠를 찾는 동안 나는 천천히 늙어갔고 어느 날부터 한 젊은 여자가 내 안에 틀어박혀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이 오면 한 번 더 뜨겁게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중얼거리는 여자, 마지막 저녁놀이 스며들기 전 그녀를 내보내야 합니다
계간 『문파』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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