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현우 시인 / 여자가 되는 방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3.

정현우 시인 / 여자가 되는 방

 

 

이상해서 화장을 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여자를 벗은 것 같아

누나의 검정 치마를 입었다.

 

거울 속에서 숨죽인 내가

립스틱을 쥔 채로

매달려 있었다.

 

아랫입술을 잃어버렸다.

쏟아지는 검은 구름들,

누나의 마스카라는

나의 베갯잇을 적시고

 

벽에 매달려 있는 동안

나는 어느 얼굴이 되는 걸까.

 

누군가 방문을 열까봐

우는 얼굴로 저녁을 닫았다.

 

나는 내 몸을 만지면서

눈을 감고 얼굴을 그린다.

 

어른이 될 때까지

나는 흩어지고 싶은 구름,

가슴이 없는 까마귀 떼,

나의 몸에서

습관처럼 풀이 자란다.

금방 풀이 죽는다.

풀숲에서 벌거벗은

여자를 훔쳐보는 마음,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들이 많아지는 밤에는,

나는 여자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방문을 잠그고 나와

반성문을 썼다.

 

존재만으로 취향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의 존재는 가랑이 밖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방문을 삐져나온 뱀들은

악몽에 목이 베였다.

밤을 켜면 벼랑은 나를 떨어뜨렸다.

여자를 흉내 내면

깨진 유리를 삼키는 밤,

바람의 목을 쥔 채로 길어지는 밤,

잘린 손가락들은 유리의 성을 쌓고

 

스타카토, 스타카토, 카스트라토*,

 

사람이 죽으면 여자일까 남자일까,

 

개들이 나의 얼굴을 더듬거리고

웃을 수 없다.

아름다운 얼굴이 지워질까봐.

 

종아리 회초리 자국이

벽에 그려진 낙서보다 숭고했다.

 

끝없이 바깥을 이어도

세워지지 않는 나의 성에서

얼굴 없는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 나간다.

 

나와 멀어진 나를

사랑할까봐

가장 어두운 구두를 신고.

 

*카스트라토 : 변성기 전의 소년을 거세하면성인이 된 후에도 소프라노나 알토의 성역을 지닌다.

 

월간 『현대문학』 2019년 9월호 발표

 

 


 

정현우 시인

1986년 평택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제4회 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