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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해철 시인 / 가을 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4.

나해철 시인 / 가을 끝

 

 

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 저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

 

 


 

 

나해철 시인 / 겨울 버스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 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

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람의 어느 봄

일렁이며 터져 남이나 북 개울과 마을을 환히 밝힐

그 날의 빛들을 생각한다.

길이 멀고 끝이 없으면 그만큼 더디 오고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될수록 애터지게 오지 않는

너는 그러나 온다.

황혼 그리고 어둠이 들어 모두들 쓰러져 눕기 전

언제나 눈부신 소리로 먼저 온다.

얼어붙은 손끝과 가슴 하늘과 산 그림자가 깨어나며

달려가 맞이하는 기다림의 끝. 평화와 따뜻한 것.

버스에 오르면 풀밭처럼 잡목림처럼 안기고 섞이어

살의 온기로 데우고 서로 녹여

살붙이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희망은 너처럼 오지 않고 또 너처럼 온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쁨과 눈물겨움

감사와 복된 춤 노래와 빛이 터지는

그날의 이 땅 위에 서듯

흙도 피도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 버스에 오르면

기어코 너처럼 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희망에 대해서 생

각한다.

몸은 덥혀지고

누군가를 데우면서.

 

 


 

 

나해철 시인 / 그건 아야해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

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

언제나 아야해

그건 아야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바보와 같은 이 행성.

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과 아내, 그 행복,

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

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

이대로 간다면

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

증오와 파괴의 추문은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

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

아이야 너는 오늘도

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

아야해, 그건 아야해

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

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나해철 시인 / 그리운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라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나해철 시인 / 까치

 

 

감나무 가지 위의 까치 세 마리

어둠의 빗장을 끄르고 있네

 

돌쩌귀 미끌리며 문 열리는 소리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것은

오직 한가지

문 밖에 황홀히 빛나는

자유

 

반가워 나아가니

문 밖은 아직 어둡고

까치들만 앞서 날아가 또 다른 문을 열고 있네.

 

 


 

나해철 시인

1956년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전남대 의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 의학박사.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산포」가 당선되어 등단. 1984년 첫시집 『무등에 올라』 간행 이후, 『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만 꽃이 되는』 『아름다운 손』 『긴 사랑』 등이 있음. 현재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중. 현재 나해철성형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