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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연호 시인 / 몸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4.

강연호 시인 / 몸살

 

 

마음아, 질척이는 밤비에 너도 젖었니

방금 먹은 독한 약에 취했는지 창 밖

젖은 꽃그늘이 다 아파 보였니

꽃잎 지운 나뭇가지들의 빈 자리가

허공의 흉터인 듯 눈에 밟혔니

 

마음아, 너도 따라 지워지고 싶었니

지워진 자리에 지우개밥처럼 남는 어지럼증

깨끗이 뜯어내고 싶었니

저 꽃가지들이야 제 허공의 흉터쯤

연초록 망울의 새살 돋아내 아물릴 텐데

마음아, 너는 무엇을 아물리고 싶었니

 

몸살은 울퉁불퉁 자갈길을 달리고

마음아, 민들레 솜털같은 날들이

죄다 혓바늘로 일어나는 밤

일없이 담배나 물고 불 붙일 뿐이었니

모였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세월은 누렇게 물든 손끝 흔들 뿐이었니

 

텅 빈 갈증의 육체성, 그 몸의 살(煞)

그게 바로 몸살이라고

네 흉터마다 고여 속살거리는 빗줄기

사소한 질투처럼 마음아

지금 꽃 피고 괴롭고 꽃 지고 괴로웠니

 

 


 

 

강연호 시인 / 미륵사지 석탑

 

 

중들이 머리를 깎는 건

세속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머리털을 깨끗이 밀어낸 뒤

맨머리를 하늘에 부벼대고 싶어서야

그들의 밋밋한 정수리는 말하자면

광합성하는 장독들 같지 않아?

햇살 찬란한 맨살이고 싶은 거지

제몸 허물고 싶어 안달인  

 

저 석탑도 마찬가지야 깨끗이 내려앉아

땡볕 아래 빛나는 자갈밭이고 싶었을 거야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

몇 줌 모래알로 흩어지고도 싶었겠지

그런데 사람들은 탑이 무너진다고

시멘트를 척척 발라놓았어

이제 어떻게 맨살을 드러내지?

눕고 싶어도 눕지 못하는 와불 같아

그나저나 탑을 버리고 떠난 절간은

극락왕생했을까?

 

ㅡ강연호 시 ‘미륵사지 석탑’

 

 


 

 

강연호 시인 / 바닥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강연호 시인 / 바람의 정거장

 

 

이 정거장에는 푯말과 이정표가 없고

레일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바람의 뒤를 따를 뿐

뒤를 따랐던 흔적일 뿐이다

이 정거장에서 바람은 사방에서 팔방으로 분다

세상의 모든 방향에 눈길을 두면

결국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떠나든 도착하든 이 정거장은

영원인지 잠시인지 머문 바람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이란, 일체의 수식을 무정차 통과시킨

앙금 아닌가, 문장과 구절과 행간과

행간의 여백마저, 여백의 침묵조차

스르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보낸 뒤

겨우 남은 지시어나 구구점 같은 것

그나마 문지르면 깨끗이 지워질 거다

그러니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귀를 기우려라, 바람의 언어는 고요인가 소요인가

이 정거장은 지금

종착이자 시발이며 경유이기도 한데

다만 바람에 처분을 맡기려 대죄하고 있다

 

 


 

 

강연호 시인 / 밥의 그늘

 

 

지하보도 만물상

구석에서 늙은 사내

밥을 먹는다

늦은 저녁은 시리다

 

찬밥에 온도가 있나

밥의 온도야말로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만물상답게

없는 것 없어서

백열전구는 휘황찬란하고

김치 국물 한 방울에 치미는 식욕

사람들은 묵묵 지나간다

 

밤의 그늘

당신의 그늘

당신, 이라는 그늘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해

지하보도 쪽방

만물상을 차려 평생이란다

없는 것 없어도

밥이 만물이란다

 

사내의 입속

그늘이 깊다

 

『기억의 못갖춘마디』 문예중앙, 2012년

 

 


 

강연호(姜鍊鎬, 1962년 ~ ) 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중.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비단길》(세계사, 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