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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진 시인 / 만추
늦은 가을을 만취하노라 사랑도 취하고 미움도 취할 때 다가 올 모진 겨울도 취할 수 있으리 화려했던 단풍도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으로 구르는데 한번도 화려해본 적 없이 본색을 잃어 가는 나는 농염의 이 가을을 취하지 않고 어찌 보낼 것이냐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억 저 편에 한낱 먼지로 사라질 것을 만추에 만추가 서러워 만취하노라
공석진 시인 / 무더위
완벽하게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다리에 잔뜩 힘주고 버텨주던 빌딩들도
한번 건들면 폭발할 것 같던 충혈된 시선들도
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가진 자들의 호들갑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람들의 멍한 무기력
그 사람들 앞에 살아보려는 의지를 불사르는 걸인의 구걸
버스터미널 한쪽 구석 낡은 선풍기 탈탈탈 의미 없이 돌아가고
지쳐 널브러진 사람들의 의식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나기에 대한 꿈은 정녕 없는 것이냐
공석진 시인 / 물구나무서는 산
문득 찾아와 눈물을 쏟는 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립다 나는 느끼고 싶다 날개가 되어 자유롭고 싶다
역삼각형의 꼭지점이 세상을 찌르고 거꾸로 서는 육중한 육신을 지탱하기 힘들어 연거푸 쓰러져도 온갖 세상 욕심 홀로 감당하기에는 고독하여 상심한 내가 역부족이다
난들 허구헌 날 밟히고만 싶겠는가 등을 내어주는 건 쓸쓸하여 안되겠다 가슴 내어주는 건 허전하여 안되겠다 짓밟는 고통은 밤새 욱신거린다
뒤집어 뒤집어져 비틀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풍경소리는 무구한 세월 동안 꾹꾹 다져져 가슴 속에 응어리진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무거운 등짐이 사라지고 소멸이 되는 순간 적멸하기전 신음하는 바다에게 달려가 정녕히 애정 어린 충고를 하리니
오! 연인이여 부글부글 끓어 속 썩이지 말고 당신도 물구나무서보구려 몰염치한 세상 욕정 남김없이 쏟아내 너무 늙어 화석이 될지언정 후회없는 늦은 사랑을 나눠 봅시다
공석진 시인 / 미안합니다
염치없는 나를 혼내줄 독주를 앞에 놓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건배를 제의한다. 악착같이 홀로 살아남으려 부축하여 함께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무관심으로 홀로 된다는 것이 내내 서럽게도 당신을 허허심장에 방치해서 미안합니다. '나도 외롭다, 나도 외롭다.' 강변하면서 정작 당신의 고독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당신의 통절한 아픔을 나누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지는데 곁에 있어도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해서 미안합니다. 천년 만년 사랑한다 말을 해놓고 숱하게 이별을 고려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에도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쉽게 망각해서 미안합니다.
소중한 당신이여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심한 갈증을 축여 줄 한 대접의 물 마중을 나가지 않는 일이 하아 이다지도 후회 스러운 일인 걸 이제서야 등신같이 머쓱하게 외칩니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
공석진 시인 / 변산(邊山)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공연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구름 뒤 숨어 얼굴 감추는 새벽녘 숫기 없는 당신을 끝끝내 대면하지도 못하고 허기진 배 채우는데 급급하여 저 또한 간단히 외면하였습니다 행여 조우할까 더욱 가라앉은 내소사를 내내 걷다가 억만년 층층이 쌓인 그리움이었을 가슴 곳곳 구멍 뚫린 채석강을 포말에 발목이 잡히도록 헤매었습니다 그래, 훗날을 기약하마 내 기어이 변산을 떠나는구나 바다에 몸 던질 절박 없는 날 흙먼지 뒤집어쓴 변산 상사화相思花 동병상련에 긴 한숨 내쉬고 연인처럼 격렬하게 포옹하고 싶었던 격포의 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아, 은밀하게 분홍빛 바람이 불지 않은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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