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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인 시인 / 안식도서관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3.

김경인 시인 / 안식도서관

 

 

서가에 너는 꽂혀 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몸 밖으로 줄행랑치는 풍경을 좇던 눈동자와

갑자기 멈춘 박동에 난처해진 심장을

난해한 페이지처럼 꼭 봉한 채

오늘의 에디터는 소문과 살의의 수완 좋은 설계자

굿바이, 아방가르드한 망상이여

작은 상자에 꼭 들어맞게 갈려 바스러지는 슬픔이여

이런 식의 출간은 상상한 적이 없다

너라는 상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향기와 살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상징을 잘 이해했더라면

네가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제법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말하고 싶다, 도서관 앞 도로에

슬픔이 가로수에 수제비반죽처럼 뭉쳐 있다가

죄다 떨어져 내리더라고

구조할 틈도 없이 초록빛 글자들이 길에 쓰러지더라고

너는 이런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너는 재능이 없구나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내년에도

시인이 되기는 글렀어

너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스푼 떠 넣으면 완성되는 빨래처럼

얼룩진 시간을 한 스푼 떠 넣으면

새하얀 내일이 오겠지

지하철에서 꼬박꼬박 졸며

지독한 꿈을 꾸어야지

읽을 수 없는 책들의 안식처에서

푸드덕거리는 생의 뒷덜미를

날쌔게 뛰어올라 물어뜯는 위대한 자들에게

걸작을 보았다라고 말해주려고

금빛 벼랑으로 남은 너의

쓰다듬을 어깨가 어디쯤일지 생각하면서

 

계간 『파란』 2019년 가을호 발표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에서 출생. 카톨릭대학교 국문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1년 계간 《문예중앙》에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랜덤하우스, 2007)와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민음사, 2012)가 있음. 2011년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