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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소나무 아래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1.

김지향 시인 / 소나무 아래서

 

 

잎을 건드리기도 전에 푸른 물살

출렁이는 소나무

눈 맞춤 한 번에도 눈 뿌리가 새파래진다

 

요령소리 풀어 놓은 솔방울 속엔

깜박이는 솔 씨가 까맣게 익어있다

 

산새 한 마리

솔 씨를 쪼아 물고 까불까불한 꽁지로

하늘 가슴에 길게 수직선 한 줄 남기고

잠적해 간다

 

솔잎이 치켜세운 바늘손톱으로

공기를 부욱. 찢어낸 하늘 전신에서

깨진 물 항아리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물을 키대로 들이켠 소나무

 

오늘 보니

풀잎보다 생생한 푸르고 또 푸른

물뿌리개가 되었네

 

 


 

 

김지향 시인 / 술렁임

 

 

뜰 밖에 잠 깬 한 그루 실버들

군살을 깨물고 새 손이

새 눈을 열어

소금에 절여진 세상 바다를

살펴보고 있다

기척을 기다리는 외딴 폐강에서도

그 겨울 횡포에 풀 죽은 팔을

맥 짚어보면서

송어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서두르는 중이다

하늘엔 한 줄 눈 붉은 실구름이

앞산 이마를 가르고

들새 몇 쌍이 새 씨를 물고

물 뿌린 햇빛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단가출한 복슬강아지

등에 실려 두돌 지난 개구장이

소금끼 먹어 술렁이는

세상 소식을 듣고 있다

톱질소리가 일어서는 아침뜰 밖엔

조용한 침잠은 없다

 

 


 

 

김지향 시인 / 시간들이 쌓이면

 

 

가을에게 닿지 않으려고

질끈 눈감고 뛰었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미 가을에 닿았네

삶은 쌓이고 쌓이면 가을이 되네

다릿목에 앉아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던 그 날부터

내가 모운 기다림도 사랑도 눈물도

이미 가을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네

빛과 어둠 사이를 오르내림이 쌓이고 쌓여

지름길과 에움길이 쌓이고 쌓여

돌밭과 가시밭 길이 쌓이고 쌓여 계곡이 되듯

계곡 같은 가을에 왔네

 

이제 계곡에서 내려가면 어디로 가지?

나를 따라오던 재생불능의 시간들은

살이 다 긁힌 채 어느 개찰구에서 잠이 들지?

 

 


 

 

김지향 시인 / 시간은 바쁘다

 

 

시간은 하루분의 파일을 열어놓고

하늘 한 필 얹어놓는다 하늘 배꼽에서

바람처럼 엎질러진 생 공기가

사방으로 몸을 찢어 뿌린다

공기가 몸을 찢을 때마다 풀씨 같은

산, 들, 강이 머리를 드러낸다

 

산에는 숲들이 들에는 풀꽃들이 강에는 물고기들이

눈썹을 흔들며 수만 개의 기호로 일어난다

 

기호는 서로 몸을 부딪치며 굴곡 심한

보도블록 바닥을 갈아엎는다

떨어져 나뒹구는 낙오 기호 몇 개비

모지라진 발통 채 앰뷸런스에 실려 나간다

입주자 오지 않는 빈 문서엔

재빨리 시간의 손이 공기를 불러온다

새로 불려온 공기는 팽팽한 배불뚝이 임부다

 

새로 태어난 새파란 새 우주로

빈자리를 채워 넣기 바쁜 시간은

좀처럼 죽을 시간도 없다

 

 


 

 

김지향 시인 / 쓰다버린 길 하나

 

 

풀 섶에 목덜미 묻힌 길 홀로

옆구리 터진 휴지통처럼 엎어져 있다

 

머리숱 다 지도록 바람소리 같은 소리꾸러미 굴러다니더니

오늘 보니 자국만 흘려두고 소리는 가고 없다

 

언저리 칡넝쿨이 멋쩍은 사랑가처럼

거드름 피우며 얽혀주고 있을 뿐

 

(세상은 밀려나간 시간 저편 꿈들은, 살아있어도

퍼다 버리는 거름지게인가.)

 

 


 

 

김지향 시인 / 아직도 풍부하다

 

 

대한민국 하늘은 아직도 풍부하다

 

끝도 폭도 안 보이는 햇빛에 들려서

금빛 불꽃이 때도 없이 타고 있는 하늘

불꽃 사이로 구름이 지나가고

올이 가늘고 굵은 빗줄기가 지나가고

비를 먹은 별똥별이 지나가고

몇 말의 바람도 지나간다

 

대한민국 하늘에 눈을 꽂아두고

마음 태우는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별을 지키는 또 한 개의 별 처럼

시간이 하얗게 마를 때까지

씨앗이 풍부한 대한민국 하늘로만

치켜뜬 눈씨를 보내고 있다

 

가슴이 풍만한 하늘은 황금빛 말고도

아직 개봉되지 않은 살아있는

자동판매기들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서서

하늘 배꼽에서 뜨고 지는 별똥만 응시하다니!

 

따가운 응시를 피하고 싶은 대한민국 하늘은

오늘도 공기열차, 비행접시, 우주왕복선 칩을 품어 안고

끝도 없이 황금빛을 줄줄이 쏟아 붓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 으뜸가는 대한민국 하늘을 사랑한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