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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청춘
동백꽃 송이송이가 저렇게는 빨갛게 탐나는 피어나는 시간을 사무치는 사무치는 시간이라 할까. 저 동박새 한 마리 동백가지에 앉아 동백꽃 송이송이를 차마 쪼다간 한 번 울고는 먼바다를 바라보는데 목이 메이는 목이 메이는 무엇이라도 있어서일까. 동백꽃 송이송이가 빨갛게 무참하게 지는 날에는 저 파랗게 질린 바다도 야심하도록 야심하도록 문창가에 해조음을 밝혀놓고, 너와 나는 홍역을 앓듯 홍역을 앓듯 목놓아 울지도 못하던 자청의 밤이 있었다.
고재종 시인 / 출렁거림에 대하여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고재종 시인 / 침묵에 대하여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침묵의 폐허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달빛은 이것이 무장무장 은산철벽을 치는 것이어서 용과 거북이의 뿔 자라는 소리 듣다 보면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 생각한다
고재종 시인 /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시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새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 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는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고재종 시인 / 화음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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