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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얼어붙은 기차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3.

김지향 시인 / 얼어붙은 기차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플랫폼엔 장승같은 사람들이

떨리는 어깨를 감싸고 붙어 앉아 있다 잿빛 공간을 받친

얼어붙은 지렛대나무 뻐석 마른 가지에 앉은 바람이 갈기를

뻗어 잿빛을 흔들다 말다 한다 외투 깃에 목을 파묻고 멀리

물러앉은 들판에 눈을 던져본다 둑 밑 논밭은 아직 오지 않는

봄을 묻어놓은 파삭한 흙살이 숨을 죽이고 있다

나는 얼어붙은 기차를 기다린다 아직 봄은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논바닥을 흔들어본다 여름에 거기 있었던 풀들을 읽는다

메뚜기의 애벌레도 펄떡 뛰어 오른다 논바닥 갈라진 틈새로 미꾸라지도

퍼덕거린다 퍼덕거리고 펄떡여도 내 손엔 잡히지 않는다 머리로만 읽는다

나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공기를 자르고 얼음처럼 산뜻한

뒷맛을 깔아놓은 바람에 휘몰린다 기차 같은 바람에 얹혀간다

세상은 여러 갈래의 길로 가지만 바람은 한길로만 간다

한 길이 내 속에 길을 내고 달린다

나는 한눈도 팔지 않고 한 길로만 달린다

여러 갈래로 풀리지 않은 한 길에 옥죄인 오늘까지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김지향 시인 / 얼음 꽃

 

 

소금인줄 알고 소쿠리를 받친다

소금 빛 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나뭇가지가 내려놓은 겨울새 두세 마리

모지라진 부리로

어정어정 목을 축이고 간다

 

산자락마다 망사 커튼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겨울은 느긋하게 앉아 세상을 구경한다

 

코발트빛 하늘도 간 데 없고

하늘에서 밤늦도록 눈을 껌벅이던 수은등도

간 데 없고 마중 나와 어깨를 들썩이던

젊은 날의 추억도 간 데 없고

 

어디서 뛰쳐나온 산발한 바람 떼가 저희끼리

혈기를 부리며 싸움판을 벌이는 이 겨울밤

뒷산의 얼음 꽃만 하얗게 까무러치며

하르르 무너지고 있다

 

 


 

 

김지향 시인 / 여름밤의 꿈

 

 

그 곳으로 가는 비행선을 기다린다

일찍 나온 별들이 한 롤씩 몸을 풀어

하늘 위의 하늘로 다리를 놓는다

 

바람이 자나간다 별떨기 다리 위로

낯선 미이라의 얼굴들을 태우고

여름밤이 달음박질 하는 꿈이 펼쳐진다

 

빗줄기가 다리 위에 몸을 누인다

별떨기 다리 위에 얹어놓은 무지개꿈이 지워진다

하늘이 까맣게 저문다

 

문득 지워진 꿈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복잡한 도시 아파트 창문 안에 몸을 가둔

나의 빈 가슴으로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이 돌아온다

 

 


 

 

김지향 시인 / 여름이 살아난다

 

 

매미가 운다 나무 속에서 나무 밖으로 운다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 잎사귀들이 반짝거린다

온 몸이 흔들린다 바람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다

하늘과 땅 경계가 흔들린다 경계에서 나온 새떼가 날아간다

하늘 끝으로 지워진다 구름이 치마폭을 펄럭인다 문득

껑충껑충 뛰어가는 바람이 등에 구름을 업고 날개를 친다

한 두 개비 떨어지던 비가 하늘과 땅을 허리띠로 동여맨다

경계가 지워진다 비속으로 열린 서랍 같은 전철이 검은 빗금을 남기며

수평으로 흘러간다 전철 속에서 매미가 운다 가다가 멈춘 전철에서

수세미처럼 비어져 나온 사람들의 발끝에서 매미가 운다

빨간 신호등을 짓뭉갠 차량이 매미소리를 매달고 달아난다

차량의 거친 발통을 붙잡고 흔들리는 파도를 타고 가는

교통순경의 입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는 나무 밖에서 운다

작년에 죽은 여름이 왁자지껄, 살아난다

 

 


 

 

김지향 시인 / 오늘도 지상의 미물

 

 

눈길의 한계를 벗어난 하늘꼭지에서

얼룩진 하늘 가슴을 뚫고

새나는 새파란 빛을

나는 감은 눈 속으로 본다

 

하늘꼭지 위에 살고 있는 그 분이

날마다 빛을 새로 만드는지

세상 어둠 속에서 허우적일 때마다

살아있는 날쌘 빛 한 꼬챙이가

획, 연줄처럼 내 머리끝을 감는다

 

흔들리는 하늘의 셀로판지가 찢어지고

하늘 기슭에서 숨을 몰아쉬며

생 바람이 달려온다

 

머리 위까지 내려온 연줄을 붙잡으려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눈을 뜨고 나면

팽팽한 바람의 배를 가르고

한 치도 떠오르지 못한

나는 오늘도 지상의 미물

 

 


 

 

김지향 시인 / 와! 나는 어디로 가지

 

 

만지면 금방 손이 데이는

불의 혀를 내민 네펜세스 꽃술

 

사방천지 늘여논 향기의 그물 속으로

일렬종대로 밀려든 곤충떼가

초고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밀물처럼 밀려들어간 곤충들이

살에 찰싹 달라붙는 꽃잎의

무진장 사랑에 주눅들었는지

 

한 꼭지도 되돌아오지 않는

비밀처럼 숨겨놓은 동굴 속에서

유리병 깨지는 비명소리

 

깊은 밤 깊은 밀실에서 소름을 씌우며

치밀어 솟네

 

와! 나는 어디로 가지?

 

우주의 옆구리 송곳처럼 불쑥 솟은

네펜세스 꽃잎 한 접시

독기의 그물이 온 우주를 감싸쥐고 있으니!

 

*네펜세스 : 보르네오 섬에서 자라며 꽃잎의 지독한 향기로 곤충을 잡아먹는 독초의 일종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