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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숙 시인 / 잘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2.

허영숙 시인 / 잘

 

 

 

  볕드는 잎잎마다 푸른 낯짝인데

  어쩌다 가지를 놓친 잎 하나 떨어져 나간다. 잠시

  계절을 잊었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무른 가지 흔들어 댄 탓이겠지

  잘 가라 ,

  너무 일찍 제 뼈를 제가 움켜쥐고 가는 것이 울컥거려 한 마디 하니

  나무도 멈칫, 잎도 멈칫

 

  여기 와서 잘 살다가는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잘 가는 것이 아니어서

  문득 그 말이 가슴에 덜컥 걸렸던 것인데

 

  살면서 무수히 많은 잘을 함부로 건넨 것 같아 때로는

  그 말이 마음을 허물기도 하지만

 

  잘은

 

  맨송맨송한 말을 다시 품어주는 말, 누군가를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말

 

  잘이라는 말에는 그늘이 없지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있고 잘 가고

  잘 살다 잘,

  한 두름의 잘 이라는 말을 꿰고 돌아오는

  밤, 청명한 물소리가 잘잘잘

 

웹진 『시인광장』 2011년 7월호 발표

 

 


 

허영숙 시인

1965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으로 등단. 현재 〈시마을〉동인으로 활동 中. 시집으로  『바코드』(문학의전당, 201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