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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용곡동 아리랑 1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4.

김지향 시인 / 용곡동 아리랑 1

 

 

널따란 논밭엔 무엇이 살까

살짝살짝 접힌 논두렁을 펴 본다

풀섶이 달빛 속에 들앉아 새근새근 자고 있다

논두렁은 아직도 쓰지 않은 풀섶들을 안고

내 발에게 오지랖을 열어주며 아리랑이나 부르잔다

앞뒤로 둘러리선 엔리치타워 놀이터에선

아이들 팔 다리가 왁자 지껄 줄넘기를 하고

드물게 아이들 틈에 낀 어른들은 먼 하늘 끝으로

높낮이도 안 맞는 아리랑을 하모니카에 담아 띄우며

말아 올린 바짓가랑이로 막춤을 춘다

일 막이 끝나고 하모니카소리가 밀어 올린

달을 등뒤에 둔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금방 하늘로 간 하모니카 소리가 톡,톡, 창문을 두드린다

하늘치마를 펄럭이던 그 줄넘기가 내 눈에 자꾸 커턴을 친다

이 막이 마악 저물어 꿈으로 간 나는 용곡동 널따란 논두렁에

빳빳이 서 있는 바람이 된다

 

 


 

 

김지향 시인 / 웃음으로 채운 여백

 

 

오늘의 여백에 웃음 하고 썼다

여백이 웃음으로 꽉 차버린다

 

여백의

풀밭에선 까르르

나무꼭지에선 와라와라

푸른 노래를 만들고 나서

하얗게 바랜 집안 공간을 채운다

 

공간이 빈틈없이 파랗게 살아나

여백이 빈틈없이 웃음으로 채워져

깨어나는 새 삶의 입구가 웃음이 된다

 

나는 본다

내 몸 안에서 발신되는

미세한 총천연색의 전파가

어둠을 죽이고 나온 빛에 들려

활짝 열린 웃음으로 바뀌고 있음을.

 

 


 

 

김지향 시인 / 위험한 외출

 

 

나는 오늘도 육체의 집을 떠나 잠시

자유로운 외출을 한다

 

욕망의 누더기를 모두 쏟아버리고

(공간의 문을 여는 열쇠만 가지고)

육체의 문을 나서면

흰빛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하얀 길이 되어 깔린다

 

한 벌의 세상 끝자락 옷섶을 열면

바람도 수직으로만 일어나고

수직으로 열린 백지의 공간으로

화살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의 발이 보인다

 

시간의 등을 타고 달리는

내 머리 위 낮게 뜬 해가

내 머리에 탁, 탁 못질을 하고

내 머리에 숭, 숭 구멍을 내고

내 머리에 쏴∼쏴∼ 빛을 쏟아넣는다

 

잎사귀 하나도 정물이 되지 않는

모두가 빛에 들려서 날아다니는 공간

나도 한 송이 물 마른 잎사귀로 날으다가

완전자유의 무차원 속으로

완전자유로워 지려는 순간

나는 또 팽팽한

나의 육체에게 멱살을 잡혀

(아직도 내 심장 일부는 빛에 꿰뚫려)

지상으로 추락한다

 

나의 육체는 나에게 속삭인다

"위험한 외출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해."

 

 


 

 

김지향 시인 / 유비쿼터스

 

 

하늘에 지우개가 지나간다

먼지가 닦인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하늘에

거울이 절벽처럼 걸린다 거울 속엔

끈 달린 새빨간 홍시가 토닥토닥 불꽃놀이 한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불꽃 속에

자전거를 탄 아이 하나 손가락만한 핸드폰으로

반짝 스치는 총알처럼 불꽃을 쏜다

하늘 가득 마띠스의 물감통이 엎질러진다

 

아이의 휴대폰엔 지우개만 찍혀 있다

 

 


 

 

김지향 시인 / 의자 한 채

 

 

그림자를 늘어뜨린 의자가

빈 집이 되어 빈 집 속에 서 있다

잘 살펴보면 가시나무에 걸린 한 쪽 어깨가

땅으로 축, 처져있다

빈 집 속을 기웃거리는 내 눈을

머리칼을 풀어헤친 어둠이 갈퀴를 내밀어

굵은 노끈의 그물처럼 나꿔챈다

나는 그 때 어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뒤로 나자빠진다

혼자 서 있던 의자도 쿵, 나둥그러진다

자던 먼지들이 벌떡 일어나 바들 바들 손을 떨며

나에게 덤벼든다

 

들판의 중간쯤에서 옆으로 새나간 길로

새참 먹을 시간만큼만 가면 의자 혼자 사는 마을이 있다

무성한 탱자나무 가시에 늘 어깨가 걸려있는

그 집의 마당엔 문어발을 뻗어 잡히는 사물마다

덥석덥석 감아넣는 웅덩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앉아 있다

군데군데 군사를 거느린 웅덩이는 사람의 발을 움켜 머리칼까지

몽땅 말아삼키는 50년대식 낡은 시간들이 종아리에 감긴다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야생초들도 눈에 불을 켜고 서 있다

눈에서 튀어나온 실핏줄이 50년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을까

 

날마다 어디서 보내오는 신호음을 온몸으로 받아적기만 하는

손을 치켜든 빈 의자 한 채, 언제 웅덩이가 삼켜버릴지 모르는

 

 


 

 

김지향 시인 / 일란성 잎사귀들

 

 

해가 긴 혓바닥으로 천천히

땅의 몸 전체를 핥아간다

땅의 입에 박힌 대못이 빠진다

헐거워진 땅에

누워서 잠만 자던 바람이 벌떡 일어나

발을 넣는다

 

멍청히 서서 하늘만 쳐다보던

나뭇가지 신경이 꼿꼿이 일어선다

 

가지에 붙어 귀를 쫑긋거리던

잎이 푸른 물을 뚝, 뚝, 흘린다

 

(새파란 세상, 일제히 움직임을 시작한)

사람의 몸에 열꽃이 돋는다

몸 일부에서

햇덩이 같은 욕망의 잎들이 피어난다

욕망의 잎사귀는 해가

제 혀를 거둬들여도

일란성 새끼들을 연거푸 복제해 낸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