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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란 시인 / 종이남자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3.

이향란 시인 / 종이남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무색 무미의 종이남자를 접는다

 

  세상을 향해, 어느 여자를 향해 허우적이던 팔과

  무던히 뛰고 달리던 다리와

  펄떡이는 뜨거운 심장 들키지 않게

 

  종이비행기가 아니어도

  던지면 어딘가 가볍게 톡 떨어질 수 있도록

  내뱉지 못하던 말과 울음이 마음껏 새어나오도록

  구겨진 생, 지나던 바람마저 들여다볼 수 있도록

 

  활활 불지를 생각은 없다

  주름살처럼 쪼글쪼글해진 그 남자 잘 펴서

  애잔함 몇 자 적어 물 위에 가만히 띄워보고

  고뇌로 가득 찬 얼굴 가려지도록

  모자도 접어 씌워주고 싶다

 

  우연히, 잠시 만나

  아무도 모르게 꼬깃꼬깃 손안에 감췄다가 하늘로 날려 보냈다가

  외로울 땐 천천히 다시 펴보던 종이남자를

  고서(古書)의 중간 페이지 즈음에 슬며시 끼워두고 싶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8월호 발표

 

 


 

이향란 시인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2002년 첫 시집 『안개詩』로 작품 활동 시작. 그 외 시집으로는 『슬픔의 속도』(2007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2011년)이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