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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그리운 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4.

고재종 시인 / 그리운 죄

 

 

산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고재종 시인 / 기도하는 사람

 

 

길가의 오락기에서 아무리 두들겨대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두더지 대가리처럼

한사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퇴행성 고독의 습관 같은 게 그를 홀로 세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우느냐고 하지 말아라

울 수라도 있다면 왜 기도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도 지쳐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는 생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던 랭보여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인분을 먹은 병사들의

굴욕 같은 생도 이미 참았으니

 

다만 오그라지고 우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과일 도사리 같은 것으로

그를 아무도 눈여기지 않는 곳에 홀로 세우는

저주받은 고독의 습관이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풍찬노숙의 나날을 누구에게 물을까

 

 


 

 

고재종 시인 / 꽃의 권력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고재종 시인 / 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고재종 시인 / 너의 얼굴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고재종(高在鐘, 1957~ ) 시인

1957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 <동구밖집 열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새벽 들><사람의 등불><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이 있고, 수필집에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