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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보낸 한철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들 아편 맛 같은 색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고재종 시인 / 무늬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나는 이제 막 중생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고재종 시인 / 묵정지 이 쓸쓸함의 저편
한때의 푸르른 피를 잘 씻어낸
억새꽃 은발들이 잔광에 반짝인다. 한때의 무성한 살을 잘 비워낸 억새꽃 은발들이 바람에 쓸린다. 이때쯤 개울물 소리는 청천에 닿고 나는 묵정지 서 마지기, 할말이 없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서러움을 잘 부린 머슴새가 시방도 쭉쭉쭉쭉 소를 몬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그리움을 잘 빛낸 머슴새가 시방도 그 누굴 호명한다. 이곳저곳 구절초가 속속 듣고 너는 못 뒤엎는 자리, 들을 귀가 없다. 바람은 또 우수수히 풀밭에서 인다. 풀들은 또 소슬하게 그만큼 시든다. 하여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가. 꽃도 새도 어둠으로 눕는 자리엔 두루총총 별이 참 많이는 돋는다. 두루총총 서리 쓴 들국빛으로 돋아선 너나 나나의 눈물의 사리를 닦는다. 그러면 타는 밭과 빠지는 수렁을 넘던 우리의 외진 사랑과 노래여, 안녕. 이 저녁 아득아득 저무는 길에서도 찔레 열매들 형형, 사상을 묻고 실베짱이 씨르래기 풀무치 한 떼는 시간 너머의 더 높은 꿈을 연주한다. 너와 난들 이 무명을 무얼로 점등하랴.
고재종 시인 /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고재종 시인 / 봄 마당에서 한나절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고 불혹은 눈앞이다. 헛간의 녹슨 경운기와 담장 밑의 풀덤불이 세월을 가르치고, 장독대의 곰삭은 옹기들은 미륵불처럼 처연하다. 서러운 것들의 모든 가슴이 미륵불 되면 좋으련만 아직도 외양간의 부사리는 영각을 쓰며 마당을 한바탕 뒤흔드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 사랑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마당 귀퉁이의 참배 꽃은 펄펄 져내리고, 나는 목이 메이는 것도 지쳐 물끄러미 생의 안마당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우편배달부는 늘 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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