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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인 / 방안의 삶
잘 익은 봄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볕이 만리로 뻗은 오늘 사람은 모두 볕이 차단된 방에서 컴퓨터 몸을 만지며 쏟아져 나오는 깨알 글자의 바둑알 부딪는 소리에 빠져들어 있다 컴퓨터 바둑알 소리로 팽팽한 방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눈과 손은 바깥 세상의 산과 들이 게우는 생선 비늘 같은 생기와 햇볕을 모두 만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바깥 기억들이 점점 지워지는 컴퓨터가 사람 몸 속에 들앉은 방안의 삶 지난 세대에겐 낯익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잘 맞춰 입어야 할 컴퓨터 삶의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젠 컴퓨터 생리에 길들여져야 할밖에
시간과 손잡은 컴퓨터의 속력이 불편하다고 컴퓨터 생리가 너무 빡빡해 시간 밖 세계로 궤도 이탈하고 싶다고 그녀는 투덜대지만 자꾸 뒤로 밀리는 그녀 두뇌가 궤도 이탈을 연기해 낼지? 궤도 이탈을 위해 눈을 접고 활짝 날개를 펴 볼지?
창 밖 잘 익은 봄 거리가 그녀를 맞으려고 깨끗이 세탁된 볕을 깔아놓고 있지만.
김지향 시인 / 백지 공간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김지향 시인 / 벽 허물기
바람도 빗겨간 가슴 넓은 산줄기를 안고 안개가 명주실 치마폭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햇살이 아득히 먼 발아래서 자꾸 바스라진다 새파란 가슴을 드러낸 산줄기들 바람에 쓸린 기러기 한 두름 안아드리고 있다 방금 마악 허공 위의 하늘을 찢으며 치솟은 우주선 한 채, 우주선을 타고도 세상을 내다보는 사람들 손엔 손가락만한 디카 폰 하나씩 들려있다 디카폰은 잽싸게 구름 살을 헤집고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 풍경에 드르륵 밑줄을 그으며 풍경눈알에다 새겨 넣은 의미를 몽땅 베껴 낸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발을 내릴 땐 우주에서 발사하는 발통 없이도 시간을 잘 굴리는 비행접시 몇 채 세상 창공으로 떠난다 바람소리만 걸려있는 지상정거장에는 수많은 어린왕자들이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키를 휘청이며 별을 찾고 있다.
(세상에서 하늘 위의 하늘로 오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육체에서 육체 위의 육체로도 들락거리고 있었네)
김지향 시인 / 별은 내 눈에서 뜬다
내가 만지는 사물마다 머리 조아리며 굴리는 쟁·쟁한 은방울의 합창 별은 내 눈에서 뜬다는 발신음 한 소절을 또렷하게 열린 내 귀가 또박또박 주워먹는다
지난날 하늘의 셀로판지에 반점으로 돋던 별 그가 이제 보니 내 가슴에 새파란 피멍으로 푸욱, 박혀 알을 낳는지 삽시간에 나의 우주가 청보석 복사기가 되었네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가슴의 블랙홀 벽에 낳은 알을 주욱― 널어놓는지?)
오늘은 내가 별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서 새로 그린 삽화 한 장 튕겨나가듯 단숨에 블랙홀 요새를 철거해버리고 고속 디지털 안테나를 타고 뛰쳐 나가네
(하늘도 하늘의 하늘도 아닌 내가 눈을 얹는 거기에 작은 우주같은 내 별은 수도 없이 내 눈에서 뜨지만)
별아, 이제는 해산의 아픔도 없는 별아,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자주 몸 바꾸는 별아, 내가 목청껏 불러도 빙글빙글 바뀌는 성대로 나를 어지럽게만 하는 별아, 이제는 그만 내 눈에서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지향 시인 / 봄 명주실 웃음
오늘 문득 실바람이 세상을 열어젖힌다
실바람 손에 든 초록 칩을 나뭇가지 겨드랑이마다 꼭꼭 묻는다 나무 겨드랑이엔 초록 손톱이 돋아나고 손톱 밑에선 뽀르통 내민 새 입술을 열어 진달래 개나리 초롱꽃 뻐꾹채 노루귀 제비꽃 줄줄이 명주실 웃음을 좌악 널어놓는다
실바람 요술지팡이에 올라탄 나비 몇 마리 몇 됫박씩 꽃가루를 흩뿌리며 세상의 몸에 봄을 입힌다 깔 깔 깔 세상은 종일 명주실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웃음을 따라 날아온 제비도 명주실 웃음을 날개에 태워 우주 밖으로 날아가느라 부산떤다
나는 종일 봄 웃음을 퍼먹으며 한 발 더 진화한 세상 속에 서 있다
김지향 시인 / 봄 어지럼증
축대 밑으로 꽁지 다 빠진 찬바람의 머리칼이 빠져나갔다
햇볕에 성긴 머리털 몇 개 흔들며 연분홍의 풋병아리들이 짧은 종아리를 내놓았다
골목에서 재기치기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아이들이 골목을 찢어놓는 소리 뒤로
창문만 열고 내다본 나는 가슴에 오래 꽂아두고 싶은 일기장처럼 유년의 한 때에 눈이 꽂힌다
깜짝깜짝 놀라 뛰는 관자놀이로 저기압에 눌리는 머릿속 어지럼증이 다시 도진다
어느새 나도 아이들의 발치께로 떠밀린 원경이 되었구나
축대 밑으로 빠져나간 찬바람의 꽁지 빠진 머리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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