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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시인 / 내간(內簡)
현미경으로 본 바늘 끝에는 운동장만한 대지(大地)가 있었다 귀를 대어보면 바람소리나 희미한 웃음소리 같은 게 들려올 것도 같았다
피 묻은 몽당 빗자루가 묵어 도깨비가 된다는 속설처럼 누군가를 찌른 바늘도 장롱 밑바닥에 앉아 요물(妖物)이 된 건 아닌지
배율을 높인 바늘 끝에는 흩어진 일가(一家)의 혈흔이 보였고 한 사람의 것으로 짐작되는 콧김과 머릿기름 따위가 뭉쳐있었다
손을 따는 것은 자신의 체취(體臭)를 핏줄 속에 흘려 뒤엉킨 매듭을 푸는 일이지만 미처 희석되지 못한 체취는 몸 속 어딘가에 박혀 사람의 모습으로 깊어지기도 할 텐데
매일 저녁 바늘귀에 눈을 맞추며 살아온 사람과 조금씩 줄어드는 바늘의 면적을 그리워하던 사람에게 한 땀 비련(悲戀)은 무딘 바늘을 주고받고서야 완성되는 겨를일까
살에 닿기 직전 가장 은밀해지는 연애를 간수하고 나면 열 손가락을 따고서도 내려가지 않던 기별이 체증(滯症)으로 남는다
시원하다,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며 읽어낸 문장 속에서 아내의 뒷모습이 겹칠 때 나라는 바늘도 직진을 멈추고 몸을 휜다
노련한 복화술사의 얼굴을 내밀듯 휘어진 속내를 기운 적이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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