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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혁 시인 / 내간(內簡)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5.

기혁 시인 / 내간(內簡)

 

 

현미경으로 본 바늘 끝에는 운동장만한 대지(大地)가 있었다

귀를 대어보면 바람소리나 희미한 웃음소리 같은 게 들려올 것도 같았다

 

피 묻은 몽당 빗자루가 묵어 도깨비가 된다는 속설처럼 누군가를 찌른 바늘도

장롱 밑바닥에 앉아 요물(妖物)이 된 건 아닌지

 

배율을 높인 바늘 끝에는 흩어진 일가(一家)의 혈흔이 보였고

한 사람의 것으로 짐작되는 콧김과 머릿기름 따위가 뭉쳐있었다

 

손을 따는 것은 자신의 체취(體臭)를 핏줄 속에 흘려 뒤엉킨 매듭을 푸는 일이지만

미처 희석되지 못한 체취는 몸 속 어딘가에 박혀 사람의 모습으로 깊어지기도 할 텐데

 

매일 저녁 바늘귀에 눈을 맞추며 살아온 사람과

조금씩 줄어드는 바늘의 면적을 그리워하던 사람에게

한 땀 비련(悲戀)은 무딘 바늘을 주고받고서야 완성되는 겨를일까

 

살에 닿기 직전 가장 은밀해지는 연애를 간수하고 나면

열 손가락을 따고서도 내려가지 않던 기별이 체증(滯症)으로 남는다

 

시원하다,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며 읽어낸 문장 속에서 아내의 뒷모습이 겹칠 때

나라는 바늘도 직진을 멈추고 몸을 휜다

 

노련한 복화술사의 얼굴을 내밀듯 휘어진 속내를 기운 적이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5월호 발표

 

 


 

기혁 시인

1979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졸업. 2010년 계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