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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 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고재종 시인 / 수평선
저렇게는 저렇게는 물낯에 꽂히는 빛의 작살 떼와
그 작살 뗄 맞고 번쩍번쩍 물낯 위로 튀는 숭어 떼와
그 또 숭어뗄 채고 채는 하도나 무정한 갈매기 떼여
이런 날엔 이런 날엔 네게 차마 못 닿고 부서지던 서러움, 서러움의 떼까지
이내 까치놀 이는 먼 곳까지
고재종 시인 / 숲의 묵언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고재종 시인 / 시간에 기대어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 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고재종 시인 /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 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날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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