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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시인 /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2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틀렸다. 역사는 낮에 이루어진다 마당에서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을 때, 풀밭에서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 모든 거래는 이루어진다. 도대체 이것들은 숨겨지는 것이 아니므로 유사 이래 하늘 아래 도무지 새로운 것이 없으므로 역사는 뻔뻔스런 얼굴로, 가면만 쓰고 있으면 된다. 가면이 밤이라고 말하면 대꾸할 말이 없지만, 비유는 혀를 굴리기 나름 특히 은유는 갖다 붙이면 비슷해지는 팔 다리여서, 잠깐 동안 이 팔 다리로, 사람 하나를 제꺽 조립할 수도 있다 뜻을 모호하게 숨긴 언어는, 이런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흑백사진처럼 오로지 밝음과 어둠만으로 세계를 조립할 수도 있다 가령 어떤 권력가가 자신의 생애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 그의 뒷손은 一家의 부를 위해 열심히 물속을 헤엄치는 물갈퀴를 만든다 마치 자신이 존재해야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듯 이 재귀(再歸)의 시간은,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구불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나타난다. 3천년이 지난 미라가 되어서도 나타난다 오로지 밝음과 어둠만으로 표현되어 있는 흑백사진처럼 색이 결핍된 모노톤―, 과거와 현재가 흑과 백 사이에만 존재하는 듯 눈속임이 통하지 않는, 오로지 진정한 가치의 본질만 떠올리는 듯 그렇게 모든 가면 속에서 숨길 수 없는 민낯을 발견해내는 것처럼 모든 색이 휘발된, 흐릿할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색인 것처럼 이 모든 비현실성이, 유사 이래 새로운 가치에의 모색(摸索)인 것처럼 역사는 그렇게 대낮에, 닭들이 모이를 쪼고 염소들이 맛있게 풀을 뜯는 시간에 이루어져 왔다
그 재귀의 시간, 저녁 산책길을 걷는다 저녁 어스름 속의 길들은, 그 모든 시간을 초월한 듯 비현실적인 색채 속에 잠겨 있다 마을은 흑백의 모노톤 속에 잠기고, 길은 흐릿해짐으로서, 모든 기억의 내면이 되는 듯 가라앉고 있다 모든 색의 모색(母色)이며 모색(慕色)인, 그 흑백사진 속에서 그리움 하나를 캐내 저녁의 노을에 굽고 있는 것처럼
월간 『모던포엠』 2020년 2월호 발표
김신용 시인 / 목괴의 시
무릎 다 닳은, 목괴가 다 된 늙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렸다. 오랜 풍상에 가지 삭아 내려앉고 뭉툭하게 변한 등걸에는 검버섯 같은 지의류들이 집을 지었는데, 그 등걸에 겨우 한 가닥 남은 가지에 사과가 열렸다. 발갛게 익은 사과, 뭉툭한 목괴처럼 변한 등걸로도 바람과 햇빛을 호흡했는지 탐스럽게 익은 사과. 얼른 따서 한 입 베어 먹고 싶지만 다가가는 손을 주춤거리게 하는 머뭇대게 하는, 그냥 오래오래 공중의 가지에 매달아 두고 싶은― 이제 무릎 다 닳아 늙어 고목이 된 나무의 한 가닥 남은 가지가 어떻게 저 빛깔 고운 사과를 익게 했을까? 눈길 거두지 못하게 하는―. 그러나 고목이 된 나무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매달아 놓은 것 같기도 해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게도 하지만, 그래, 가만히 눈 감으면 보인다.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처럼 목괴가 다 된 나무의 뭉툭하게 변한 등걸이 끈질기게 뻗고 있는 뿌리가―. 아직 살아, 뜨겁게 땀 흘리며 야윈 두 다리 힘줄 버팅기고 있는 뿌리가―. 이제는 가지들도 삭아내려 전신에 검버섯 같은 지의류에 덮였어도, 일생의, 그 혼신의 힘으로 밀어 올린 사과 하나―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의 눈빛 같은, 발갛게 익은 사과 하나―
계간 『문파』 201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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