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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 타인의 나날
달팽이는 말한다. 새와 나무 사이에 걸린 문장이 헐거워지면 당신을 잊어도 될까. 달팽이는 말한다. 왜 날짜 지난 신문 가까이 앉으면 배가 고플까. 달팽이는 말한다. 두 개의 모자를 쓰면 꽃이 될 수 있을까. 너는 말한다. 사라진 발과 사라진 손과 사라진 머리카락과 사라진 발가락에 대하여.
껍데기를 제거한 달팽이 48마리.
파슬리 2묶음, 마늘 3쪽, 아몬드가루 100g, 버터 150g, 펜넬 뿌리 2개, 처빌 1다발, 쪽파 1다발, 쑥 1다발, 올리브 오일 100ml, 라임 1개, 크랜베리 20g, 소금과 후추 약간.
붉은 피로 빚어진 짐승은 왜 지난여름 산란하지 않았을까. 도마에 젖은 손을 대면 입술만 남은 여자를 만질 수 있을까. 페루를 가본 적 없는 사람과 폐를 나누어 줄 수 없는 사람과 눈동자 아래 빗방울의 표정을 그려 넣은 사람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말할 수 없었다.
소금과 후추와 껍데기가 없는 달팽이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달팽이는 말한다. 왜 머리 위에 수평선을 그린 뒤부터 숨을 쉴 수 없을까. 온몸이 입술인 사람이 죽은 나무 위에 엎드려 있다. 가장 낮은 몸이 그늘을 밀어내고 있다.
젖은 등 위에 놓인 공중이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계간 『시와 사람』 2019년 겨울호 발표
최형심 시인 / 물속의 요람
파란 침묵이 달팽이를 끌고 갔다.
손톱 밑에 별이 맞물린다. 식은 지붕을 지나가는 새들의 발소리를 듣는다. 물방울대신 물방울무늬 스커트가 흔들린다. 고양이가 밀어놓은 낮잠이 와서 발 아닌 달이 자주 붓는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하늘과 바다가 갈렸다. 뒷벽에는 기울어진 소녀들, 눈시울은 어느새 헐거워 덜컥 손가락 하나를 놓친다.
가장 긴 장마가 와서 만조에 초대된 영혼들, 포말과 노랑나비는 서로를 모른다. 새벽과 헤어지는 은어 떼가 입안을 헹구고 간다. 모래알에 마음이 생겨난다.
바람이 만진 타인의 삶이 이따금 꿈을 지우러 온다. 태중에서 가져온 암전을 꺼내 사용 중이다. 폐공장에서 허공이 분해되고 있다.
폐선은 삼백 네 가지 어머니를 가진 적이 있다.
계간 『시와 미학』 2015년 봄호 발표
최형심 시인 / 저공비행
조용한 사람들 곁에는 조용한 봄이 와서 머물렀다. 낮은 목책에 와 울음냄새를 맡아볼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소리에 인적 드물어지면 무거워진 물방울들이 수호초 곁을 떠났다.
수학자들의 날에는 곡선에 맞춰 하루를 보냈다. 지구 반대편만큼 먼 별이 또 있나……, 발바닥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묵음을 짚은 어릿광대들, 옆걸음으로 천년을 가서 은비늘 아래 들 수 있을까. 하절(夏節)에 이른 자들의 이름이 길어지고 있었으므로 아이들은 오월의 행성들처럼 기차를 타러 갔다.
새들의 계절에는 청란(靑卵)을 품은 나무들이 계단의 표정에 다가가 앉았다. 낮은 물자리 위로 나비의 숨소리가 내려왔다.
이안류에 쓸려간 화요일처럼 휘파람에 굽어진 할미새가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풀숲이 불쑥 푸른 혀를 내밀어 계절이 없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곳,
물수제비를 뜨는 저편에서 밥 타는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한쪽 눈을 감는다. 까만 젖꼭지에 물린 그리운 계급들 보리밭으로 가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허공에 꽂으며 사람들은 슬픔이 발보다 크다 했다. 종이박스 안,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어디도 가지 않았다.
월간 『시와 표현』 2017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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