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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병승 시인 / 도둑키스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8.

황병승 시인 / 도둑키스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덮쳤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

  뿌리째 흔들렸나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

  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 라이터…… 라이터……

 

계간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발표

 

 


 

황병승[1970. 4. 4 ~ 2019. 7. 24]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2003년 《파라21》에 〈주치의 H〉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등이 있음. 201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과 2013년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 2019년 요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