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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인 / 비 오는 날의 삽화
창문은 눈이다 눈밖엔 다 쓰고 버린 폐지 같은 시간들이 떠다닌다
철길 너머 찻길엔 갈잎소리를 내다 붓는 비속을 동 동 발을 굴리며 엎어진 차량들 옆으로 젖은 뻘에 눌려 불쑥불쑥 입이 나온 풀들이 축 쳐진 머리칼로 진종일 지분거리는 산성비를 패대기치고 있다
찻길을 멀리 비켜선 고층 아파트 창문들도 헤쳐 놓은 오지랖을 오므리며 뛰어와 머리 부딪는 비를 내쫓고 있다
건너 마을의 보석 밭을 가려버린 빗줄기 아래 온 몸을 열고 있는 강기슭엔 다 헤진 추억을 꺼내 쓰는 유람선 한 채 온 힘으로 불을 밝히며 기진한 팔다리로 한 장의 편지를 물 위에 띄우고 있다
창문에 붙어 선 사람들은 새 소식을 찾는 듯 두근거리는 눈으로 멀리 가물거리는 불투명 속 물살이 보듬고 있는 말없는 편지를 헤쳐보는 중이다.
김지향 시인 / 비속의 도시
땅에 닿으면 몸이 바스러지는 수만 개의 거미줄에 빌딩 숲이 젖는다
끝도 없이 내리는 거미줄 속에서 불쑥불쑥 키를 일으키는 빌딩들 머리꼭지를 허공에 박으려다 주루룩 퍼져 앉는다
도시는 비속에 자란다?
목이 마를 때 아무데서나 퍼마시던 달빛도 걷히고 없는 오늘의 도시 검은 늪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도시의 거미줄 속에서 한 묶음 연골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삭아간다
이제 도시는 여행가방 입을 잠그듯 검은 늪의 품을 채우고 활활 타는 불가마의 블랙홀로 싸악 빨려들어가 무한 방목의 검은 빗줄기 속에서 다 젖은 휴지가 될 차례만 남았을까.
김지향 시인 / 빠른 걸음으로
창 너머 또 창만 있다 창 밖엔 햇빛을 신고 몇 장의 삶을 깔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환히 내다보인다
멀리 지붕 너머 허공을 안고 있는 밤나무 숲, 밤나무 숲에서 자꾸 솟구쳐 뛰어가는 은방울 소리 우리집 창문에도 걸려 방울소리를 흘린다 소리의 날개 한자락을 베어내 가슴에 담는다
햇빛이 곱슬머리처럼 창틀에 와서 꼬부라지면 혼자서도 가슴에서 은방울 소리 자아 올리는 나는 햇볕에 타다만 추억의 두루마리 끝자락을 펴며 어딘가에 남아있을 성냥개비를 찾아 본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창 너머 빠른 걸음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발자국이 추억의 두루마리를 마저 쓸어가 버린다 멍청한 나는 창안에 갇힌다.
김지향 시인 /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그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빛나는 이름 사람의 무리가 그대 살을 할키고 꼬집고 짓누르고 팔매질을 해도 사람의 손만 낡아질 뿐 그대 이름자 하나 낡지 않음 하고 우리들은 감탄한다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대가 멈추었던 자리엔 반드시 바람이 불어 기쁘다가 슬프게 패이고 슬프다가 아픔이 여울지는 이름 그 이름이 가슴에서 살 땐 솜사탕으로 녹아내리지만 가슴을 떠날 땐 예리한 칼날이 된다 그렇지, 그대는 자유주의자 아니 자존주의자이므로 틀 속에 묶이면 자존심이 상하는 자 틀 밖에 놓아두면 보다 더 묶임을 원하는 자, 그대를 집어들면 혀가 마르거나 기가 질려 마음이 타버리거나 한다고 우리는 때때로 탄복한다 그렇지, 사랑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 실은 사랑이 슬픔 속에 자라지만 기쁨 속에 자란다고 진술한다 실은 사랑이 아픔 속에 끝나지만 새 기쁨을 싹 틔운다고 자술한다 사랑의 끝남은 미움이지만 실은 끝남이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사랑은 사랑은 끝없이 자백한다
김지향 시인 / 사랑 법
바람이 풀잎을 사랑하듯 풀잎처럼 밟히는 자를 높이신 그 분을 나는 사랑한다
태초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랑 법을 드러내 보인 자를 사랑한다 천민의 천한 발을 씻긴 그 사랑을 내가 사랑한다
없음을 있음으로 증명하기 위해 오신 이를 사랑할 줄 아는 자를 나는 끝내 사랑한다
김지향 시인 / 사랑의 돌팔매
그 날 창문을 뚫고 창문 뒤편으로 빠져나간 그대 돌팔매 방심한 방안의 우리 심장도 못 맞추고 우리 머리칼 하나 못 맞추고 한 알 티도 없는 하늘나라 보좌에 곤두 박혔으므로 넘치는 힘을 휘날리며 곤두 박혔으므로 어김없이 되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눈을 떴었지 우리가 눈을 뜰 때 눈 속 모닥불도 환히 눈을 뜨고 멀지않아 우리 심장을 다시 겨눌 그 돌팔매를 찾아보았지 그 때 였어 하늘 보좌에 곤두 박힌 돌팔매가 커다란 사랑의 불새로 오고 있잖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불새 한 마리 파란 하늘에서 불꽃놀이 하다가 나직이 나직이 돌아오고 있잖아 그래, 그것이었어 사랑의 불새로 돌아옴, 바로 그것,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창문을 열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 안아야할 우리의 희망이다 하늘 문도 연 하나님의 용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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