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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 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 난발의 바람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 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고재종 시인 / 에로스의 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입는 육체는 타는 듯이 취하는 향기와 터진 석류의 신음이 퉁기는 탄금
한 세계를 발사하는 치명의 눈빛과 붉은 입술의 이승저승 출렁이는 파도의 무한을 하루 더 춤추게 할 시간의 깊숙한 창날
차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음부에서 새어나온 고유의 방언들이 처절하게 미끄러지는 모든 색택과 조형의 전위인 달항아리
막 따낸 수밀도를 베어 물며 달고 탄탄한 모든 것의 목록을 해독하는 미뢰, 에로스의 극히 사적인 혀는
뜨거운 왕국의 첫 글자 추문의 고요라면 더 뜨거울 왕국의 화두
승인하라, 시와 나비의 리듬 질정 없는 연주의 알레그로비바체 아편 먹은 듯 번지는 총천연색의 꽃구름
고재종 시인 / 외로움에 대하여
들어봐, 저 처서철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 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들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이 목 늘어나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고재종 시인 / 웅숭 깊어지는 사랑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고재종 시인 / 유서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 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 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었따! 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 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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