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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9.

고재종 시인 /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 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 난발의 바람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 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고재종 시인 / 에로스의 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입는 육체는

타는 듯이 취하는 향기와

터진 석류의 신음이 퉁기는 탄금

 

한 세계를 발사하는 치명의 눈빛과

붉은 입술의 이승저승

출렁이는 파도의 무한을

하루 더 춤추게 할 시간의 깊숙한 창날

 

차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음부에서

새어나온 고유의 방언들이

처절하게 미끄러지는

모든 색택과 조형의 전위인 달항아리

 

막 따낸 수밀도를 베어 물며

달고 탄탄한 모든 것의 목록을 해독하는

미뢰, 에로스의 극히 사적인 혀는

 

뜨거운 왕국의 첫 글자

추문의 고요라면 더 뜨거울 왕국의 화두

 

승인하라, 시와 나비의 리듬

질정 없는 연주의 알레그로비바체

아편 먹은 듯 번지는 총천연색의 꽃구름

 

 


 

 

고재종 시인 / 외로움에 대하여

 

 

들어봐, 저 처서철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 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들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이 목 늘어나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고재종 시인 / 웅숭 깊어지는 사랑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고재종 시인 / 유서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

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

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었따!

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

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해댔다.

 

 


 

고재종(高在鐘, 1957~ ) 시인

1957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 <동구밖집 열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새벽 들><사람의 등불><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이 있고, 수필집에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