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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시인 /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즐거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오렌지라는 단어에 힘을 뺀다 쪼그라든 혹은 비틀린 연애가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파먹다가 오렌지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남겨진 혹은 떠나간 연인이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오렌지라는 단어를 먼저 먹는다 실체 없는 혹은 맹목적인 사랑이 된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숨기고 오렌지라는 단어도 숨긴다 누가 오렌지를 엿볼까 훔쳐 갈까 종일 일을 설치고 있다 즐거운이라는 단어를 길게 잡아 늘이고 오렌지라는 단어도 길게 잡아 늘인다 외줄 같은 혹은 엿 같은 기억이 된다 펜대를 굴리며 머리를 박고 즐거운을 파먹다가 버리다가 숨기다가 늘이다가 오렌지를 내뱉다가 먹다가 숨기다가 늘이다가 우울한 핫도그를 먹는다
계간 『시산맥』 2020년 봄호 발표
강순 시인 / 식물성
어쩌니 당신은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작은 단어 틔울 때 연신 자궁에 힘을 주다가 방금 낯선 문장을 쌌다 문장 푸를 때까지 모든 계절 눈치 보다가 거대한 산통이 우르르 파도로 몰려와
여기는 당신을 밀어낼 수 없는 화분 속 당신은 말을 하고 나는 듣지 경청은 나의 운명 내가 귀를 열 때 당신이 걸어 들어와 내가 입을 닫고 당신이 앉거나 눕는 소파에서 당신은 생각난 듯 가끔 나를 칭송하지
내가 할퀴지 않아서 지구가 안전하다고 내가 반항하지 않아서 지구가 평온하다고 내가 무섭지 않아서 지구가 고요하다고
어쩌니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모르고
어린 새끼들을 할퀴며 손톱을 물어뜯고 어미에게 반항하며 발톱을 세우고 벌레들에게 악문으로 저항하다 방금 또 낯선 문장을 피똥으로 쌌어
검은 그림자는 왜 계속 검은 그림자일까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자궁이 하혈하는 소리
어쩌니 지구는 아직도 지구를 모르고
계간 『열린시학』 2019년 가을호 발표
강순 시인 / 미스 미스터 임파서블
너는 바다를 말하고 나는 바이올린을 듣는다 나는 나무를 말하고 너는 피아노를 듣는다 너는 미래를 말하고 나는 과거를 듣는다 나는 사물을 말하고 너는 허공을 듣는다 그사이 첫 번째 접시가 비워진다
미끄러지는 과거와 미래 사이 토끼가 울타리를 벗어나고 어미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흐르는 달빛과 강물 사이 너의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고 나의 소녀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사이 두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토끼 대신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고 강아지들이 이웃에게 분양되었다 타원형 얼굴이 말하고 각진 얼굴이 듣는다 각진 얼굴은 진급을 해서 급여가 오르고 타원형 얼굴은 암막 커튼을 치고 시를 썼다 아빠가 되어 본 적이 있는 미래가 말하고 소녀가 되어 본 적이 있는 과거가 듣는다
그사이 세 번째 접시가 우아하게 물러나고 냅킨이 공손하게 우리의 입술을 닦는다 사물들이 귀를 열고 우리를 잘 들어서 너의 아이가 도피 유학을 가고 나의 소녀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훌쩍 자라는 사이 다섯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우리는 아무 사물에나 대고 안주를 더 달라고 말하고 사물들은 우리의 눈치를 보며 허둥댄다 네게는 그런 아내가 없고 내게는 그런 소녀가 없다는 걸 사물들이 눈치챘는지 모른다 모든 사물들은 너와 나를 모짜르트처럼 들었다가 베에토벤처럼 떠벌린다
어느새 우리는 바다와 나무를 함께 듣는다 토끼와 강아지가 잠시 잠든 사이 카페 창문 밖에는 눈빛이 붉은 달이 휘영청 우리를 주시하고 사물들은 곧 입을 열어 우리의 현재를 소문낼 준비가 되어 있다 너의 아내가 해장국을 끓여 너를 부르고 나의 소녀가 밤새 시 한 편을 완성했다 그사이 여섯 번째 맥주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톱의 안부를 묻지 않고 헤어지는 법을 알고 있다
계간 『서정시학』 2019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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