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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나는 언제 자전하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9.

최문자 시인 / 나는 언제 자전하나

 

 

지구가 돈다

날마다 오고 있는 저녁을

이 별빛을

내가 먹어버린 사과를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방법

 

의심이 생긴다

 

모두 쓰러뜨리고 싶을 때

나는 자전한다

잉크가 떨어졌을 때

의자가 넘어졌을 때

부스러기들이 쏟아질 때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내던질 때

깜빡거리다 내가 아닐 때

부서지면서 가능한

 

저녁이 오고

지구가 사과를 놓친다

 

사람들이

마구마구 의심의 사과를 찾아다닌다

사과 같은 나를 찾아서

나를 반도 안 읽고 반도 안 먹어보고

마구마구 내동댕이 친다

 

지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사과처럼 떨어뜨린다

 

남아도는 사과들

남아도는 불행들

 

지구는

까맣게 탄 폐허 한 채

얼굴이 붉은 거대한 부표 하나

 

한 밤 자고나면

사과가 발각해낸 내일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계간 『시와 시학』 2019년 겨울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처음 접시

 

 

결혼하고 석달쯤 지나서

우리는

처음접시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캄캄함을 생각했다

두 가지 이상의 무거운 빵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사랑은 빵과 다른 중력

 

식탁 위에서

팔을 힘껏 뻗어도 팔이 닿지 않던 가난

접시에 담긴 빵들이 무거워서

그 단단한 곳

낯 선 마루 위에

여러 번 접시를 떨어뜨렸다

 

접시 안에 가득한 명제들

 

손가락을 베고

문을 열고 나와

들판 나무처럼 서있었다

 

깨진 접시에서 꺼낸 말들이

접시의 경계를 넘었다

 

깨진 접시에도

빵의 손이 달려 있었다

빵 안에 없던 나의 문장들이 있었다

 

접시를 깨뜨리고

나는

매일매일

노트에다 내 것이 아닌 빵의 이야기를 썼다

 

계간 『시와 정신』 2019년 겨울호 발표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등이 있음. 박두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신석초문학상, 한국서정시문학상 등을 수상. 협성대 문창과교수, 同 대학 총장, 배재대 석좌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