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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택수 시인 / 소금쟁이의 연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2.

손택수 시인 / 소금쟁이의 연애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손택수 시인 / 시골버스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손택수 시인 / 시집의 쓸모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 질을 하다가

(아마도 복수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시집도 시도 시인도 다 버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 전에 절판된 시집

이제는 표지 색도 다 닳아 지워져 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 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손택수 시인 /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손가락을 걸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손택수 시인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 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孫宅洙, 1970년 ~ )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제2회 부산작가상을, 「목련 전차」, 「아버지의 등을 밀며」 등 5편의 시로 2003년 문학세계사가 주관하는 제9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으로 2004년 제22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제3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목련 전차』로 제14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제13회 노작문학상에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등 5편이 선정됐다. 현재 실천문학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