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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겸 시인 / 부화(孵化)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1.

김백겸 시인 / 부화(孵化)

 

 

  ‘높은 전각에 오르면 구름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고, 청홍(靑紅)으로 꾸민 아름다운 방안이 눈부시고, 실로 엮어 만든 발이 이슬처럼 드리워지고, 엷은 비단의 휘장이 구름처럼 펼쳐진다. 방마다 아름다운 미녀들이 즐비하며, 황금의 술잔이 화려하게 오고간다. 맑은 현악기소리가 실내를 메우면 무희들이 간들거리며 춤을 추고 애절한 피리소리는 노을 밖으로 울려퍼진다. 난초밭에 향기로운 꽃을 꺾으며, 진주가 쌓인 연못에서 빨간 꽃을 즐긴다.’

 

  현생에서 나는 포박자(抱朴子)가 묘사한 부귀영화를 21세기 문명버전으로 바꾸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밤벌레야

  밤의 녹말에 취해 아귀의 꿈에 잠겨있는 밤 발레야

  철갑선같은 밤 껍질 밖에

  금화 같은 해가 뜨는지 은화 같은 달이 지는지

  폭풍이 부는지 황사 바람이 부는지

  삼신할미가 물린 밤 젖을 먹고 있는 밤 벌레야

  밤을 그만 먹으렴

  알루미늄 찜통에서 밤과 함께 삶아지기 전에

  밤과 함께 삶아져 인간 아귀들에게 먹히기 전에

  밤벌레야

  철갑선 같은 밤 껍질 밖으로 나와 나방이 되렴

 

  70억불의 부를 이룩한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몸이 고목처럼 말라 죽었다.

  세계가 IT문화를 선도한 그를 에디슨이나 벨의 공적에 비교하고 칭송했다

  스티브 잡스는 행복했을까

  청춘시절 극동불교의 선승이 되고자 했던 그가 인생의 선택을 바꾸었다면

  시간의 불에 삶아지는 밤벌레의 운명을 면했을까

  나는 연일 매스콤의 톱을 장식하는 미국 밤벌레가 부러운 한국 밤벌레 일까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2월호 발표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푸른사상, 2010)이 있음.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이며 웹진 『시인광장』 主幹. 계간 『시와 표현』 主幹. 한국원자력연구원 근무.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