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혜경 시인 / 두려움의 근거(根據)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3.

황혜경 시인 / 두려움의 근거(根據)

 

 

  드러내고 싶었던 현재가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될 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

  감히 뛰어넘을 수도 없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타이밍

  시간과 사건의 끔찍한 둔갑술(遁甲術)

  내가 무섭다

  백발을 쓸어 넘기며 결과로 바라보면 진저리가 날지도 모를

  그 참혹한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시시한 실화를 규제하는 법으로 단속하라 하면

  벌벌 떨었던 시간들 시시하게 없던 걸로 하고 싶지만

  고독지옥의 난이도(難易度)는 더 어려운 쪽으로 뾰족하고

  도는 피의 고동(鼓動)소리는 언제나 뿌리 쪽에서 들려온다

  도, 도, 도, 첫 번째 음(音)처럼 낮게

  거스를 수 없는 근거(根據)는 어쩔 수 없이 나로부터 시작되고

  두려움의 터전이 나의 근본이 되는 날

  심장이 몇 개쯤 더 있는 것처럼 두근거리지만

  통점(痛點)도 열 개쯤 더 있는 것처럼 아프지만

 

  심장의 통점(痛點)을 잘 간수하고 있으라고 해놓고

  감수하고 두근거리기로 하자고 해놓고

  나는 나에게

  그래놓고

 

  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날 때

  어느 쪽으로 어떤 종점(終點)도 찍히지 않을 때 결론은 맡겨버리고 싶지만

  즐겁다, 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즐겁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질 수 있게 되면 갖기 싫을 것 같아서

  갖고 나면 도로(徒勞) 돌려주고 싶을 것 같아서

  제 발로 두려움의 가장 끝으로 몰아 돌아가는 그림자가 여럿 있지만

  누구를 위한 지금의 것이 후에 반대쪽을 위한 효과가 되는 일에 대하여

  웃고 있는 오늘은 모르지 얼마 후에 울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까 두려운 것은 미리 겁먹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몰랐던 사실들 때문이지만

  나는 일찍 맞이한 체념이거나 초안이므로 두려움이 나를 지명한다해도 괜찮지만

  안 괜찮지만 괜찮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근거

 

  행동에 순서가 없어지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지만

  절규는 늘 한통속이고

  절규의 동질(同質)과 동률(同率)의 절규에 대해

  똑같이 너에게도 묻고 싶어지지만

  쇠잔(衰殘)을 다 타 넘고 나서 나에게도

  타인을 위해 무릎을 꿇는 때가 오면

  차차 두려움도 차차, 차차, 그 뿌리를 거두게 될까

 

  지나간 그날이 오면

  나는 나에게

  다 책임지라고 말해버리고

  다음을 위하여 저 멀리 먼저 가 있고 싶지만

  도, 도, 도, 첫 번째 음(音)처럼 낮게

  거스를 수 없는 근거(根據)는 어쩔 수 없이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는 나의 근거

  무섭다 안 무섭다 무섭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2월호 발표

 

 


 

황혜경 시인

인천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2010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