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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3.

강은교 시인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강은교 시인 / 꽃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강은교 시인 / 등불과 바람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강은교 시인 / 물에 뜨는 법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강은교 시인 / 봄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