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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사십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3.

고정희 시인 /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시인 / 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고정희 시인 /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고정희 시인 /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정희 시인 /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