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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시인 / 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고정희 시인 /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고정희 시인 /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정희 시인 /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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