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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손택수 시인 /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 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 내린다 꽃 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 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 내린다 목 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 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손택수 시인 / 얼음 탁본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 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마음에 탁본이라도 떠볼까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손택수 시인 /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손택수 시인 / 일획
들판에 비가 비문을 읽는다
읽는 일은 지우는 일
속으로 삼키고 삼켜서 모래알로 출가시키는 일
탁본을 떠도 뜻을 알 수 없는, 한 이백 년쯤 묵은 글자가 달싹거린다
흙먼지를 품은 글자 속에서 돋아난 싹
지워지고 지워져서 푸른 삐침
획 끝에 꽃이 벙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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