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입술 없는 자의 팬플룻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2.

강기원 시인 / 입술 없는 자의 팬플룻

 

 

  수장(水葬)된 자가 일어나 손 흔드는

  신성리 갈대밭

  된바람에 뺨을 내맡긴 갈대들이 서로가 서로를 쳐 모로 쓰러진다

  그 사이로 우우

  쓰러지기 전 간질환자의 입에서 울려 나오듯

  음울하고 깊은 신음소리

  어둡고 추운 강의실에서 치뤘던

  문서관리 시험날

  갈대처럼 여윈 그녀가 거품 물며 쓰러지는 걸 보았지

  그때 들었던 먼 곳의 팬풀룻 소리

  지금 또 어디선가 입술 없는 사람이 팬플룻을 부나 보다

  바람의, 갈대의 영혼이 우는 악기

  반인반수 팬(pan)의 슬픈 전설이 흐른다

  구멍마다 심장이 있는 듯 흐느끼는

  반음계의 긴 독주(獨奏)

  일몰을 몰아오는 갈대밭에서

  오래 전에 죽은 한 사람을 생각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2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 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 2006)이 있음.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혜미 시인 / 목요일의 오달리크  (0) 2020.07.22
정용화 시인 / 추파(秋波)  (0) 2020.07.22
김영남 시인 / 치자꽃  (0) 2020.07.22
신현락 시인 / 달의 시간  (0) 2020.07.22
박몽구 시인 / 분재  (0) 2020.07.22